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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제자품

마하마우드갈리야나<대목건련>

by 돛을 달고 간 배 2017.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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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마하마우드갈리야나<대목건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찿아가서 병을 물으라> 목련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를 찿아 가 병을 묻는 일을 저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바이샬리 성으로 들어가 거리에서 많은 거사들을 위해 법을 설하던 옛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마힐이 다시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대목련, 백의거사를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 그대가 설하는 바와 같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법 그대로 설해야 합니다.
법에는 중생이 없습니다. 중생의 때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 자아의 존재가 없는 것은 나의 때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 수명이 없는 것은 생사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  개아가  없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생이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법이 항상 적연한 것은 모든 모습을 없애기 때문이며,
법이 모습을 떠난 것은 인식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며,
법에 이름이 없는 것은 언어가 끊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법에  말이 없는 것은 크고 작은 생각을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 모양이 없는 것은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법에 부질없는 말이 없는 것은 필경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그것은 개체로서의 자아에 속한 것과 관계가 없으므로 그러한 것은 없으며,
법에 분별이 없는 것은 식별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법에는 상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비교되는 것이 없으며,
간접적인 원인과는 관계하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원인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에 골고루 나타나 있으므로 사물의 진실한 본성과 같으며,
그것 스스로가 타자에 의하여 종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물의  진실에 따르는 법이 어떠한 환경에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인 진실에 머물러 있는  것 입니다.
또 법이 동요하지 않는 것은 여섯가지 대상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법에 오고 감이 없는 것은 그것이 시간속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은 공을 따르고 차별을 떠났으며, 바라고 구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법은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떠났으며,
법은 더하거나 덜함이 없으며,
법은 생멸이  없으며,
법은 돌아가는 봐도 없습니다.
법은 눈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여의였고,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법은 상주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법은 일체의 분별하는 관찰과 소행에서 떠났습니다.
대목련,
법상은 이와 같습니다.
어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법을 설하는 사람은 설하는 것도 없으며, 가리키는 것도 없습니다.
그 법을 듣는 사라에게 있어서도 듣는 것도 없으며 얻는 것도 없습니다.
비유하면 요술하는 사람이 요술로 지어진 인형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러한 뜻을 세워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중생의 능력에 날카롭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며, 능히 지견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어야 하고,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염원하여 삼보가 끊이지 않게 한 다음에  설법해야 합니다>고.
유마힐이 이법을 설하였을 때,
팔백의 거시들이 한결같이 가장 높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러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찿아가 병을 묻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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