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전 입구에는 천일 기도라고.....
지극정성이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뭇 인연있는 이들에게 이어지길....
대웅전 법당안에 웅장한 삼존불이
사바세계 온갖 고민을 같이 하는 듯
가진 것 베풀 줄 아는 마음의 파동이 일어 나길....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세상의 즐거움을 다 가진 듯....같이 나누어 가질 수 없을까?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를 입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상에서 약간 들어올린 왼쪽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 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 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입체감을 나타낸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졌다. 왼팔은 거의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 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곳에 마음의 번민을 내려 놓으란다.
신라 경문왕 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신라 경문왕 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의 염원을 굳이 간직하고....행복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시비와 분별을 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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