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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고승전/법현전-3

by 돛을 달고 간 배 2025.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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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을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두려워하였다.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
법현은 그들이 불경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중국의 대중 승려들 사이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바람에 실려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된 곳이 없었다.

旣而附商人大舶循海而還舶有二百許人値暴風水入衆皆惶懅卽取雜物棄之顯恐棄其經像唯一心念觀世音及歸命漢土衆僧舶任風而去得無傷壞

10여 일 정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였다.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20여 일 만에 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다. 온 배 안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이 사문(沙門)을 태운 죄에 연루되어 우리들이 낭패(狼狽)를 당하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시주가 성난 목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만약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들을 공경하오.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께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상인들끼리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經十餘日達耶婆提國停五月復隨他商東適廣州擧帆二十餘日夜忽大風合舶震懼衆咸議曰坐載此沙門使我等狼狽不可以一人故令一衆俱亡共欲推之法顯檀越厲聲呵商人曰汝若下此沙門亦應下我不爾便當見殺漢地帝王奉佛敬僧我至彼告王必當罪汝商人相視失色僶俛而止

이미 먹을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없어졌다. 오직 바람에 실려 바다를 떠내려갈 뿐이었다. 뜻밖에 어떤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명아주 풀[藜藿菜]을 발견하고는 짐짓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을 알았다. 다만 아직 어느 곳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의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이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嶷)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여 믿었다. 뜻밖에 사문이 멀리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갔다.

旣水盡糧竭唯任風隨流忽至岸見藜藋菜依然知是漢地但未測何方卽乘舩入浦尋村見獵者二人顯問此是何地耶獵人曰此是靑州長廣郡牢山南岸獵人還以告太守李嶷嶷素敬信忽聞沙門遠至躬自迎勞顯持經像隨還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靑州刺史)가 법현이 더 머물러 겨울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법현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하는 바를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서울로 갔다.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게 나아가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ㆍ『방등니원경』ㆍ『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을 번역해 내었다. 거의 백여 만 글자나 된다.
그러고 나서 법현은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세상에 내어 널리 유통시키고 교화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였다.

頃之欲南歸靑州刺史請留過冬顯曰貧道投身於不反之地志在弘通所期未果不得久停遂南造京師就外國禪師佛馱跋陁於道場寺譯出『摩訶僧祇律』『方等泥洹經』『雜阿毘曇心』垂百餘萬言顯旣出『大泥洹經』流布教化咸使見聞

어떤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성명(姓名)은 전하지 않아 알지 못한다.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으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한 부를 베껴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다.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길이 일어나서 그의 집까지 미쳤다. 재물이 죄다 타버렸다. 그렇지만 오직 『대반니원경』만은 엄연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울에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 나머지 경장과 율장은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86세이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답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有一家失其姓名居近朱雀門世奉正化自寫一部讀誦供養無別經室與雜書共屋後風火忽起延及其家資物皆盡唯『泥洹經』儼然具存煨燼不侵卷色無改京師共傳咸歎神妙其餘經律未譯後至荊州卒於辛寺春秋八十有六衆咸慟惜其遊履諸國別有大傳焉
출처: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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