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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관음 기도처를 찾아라. 보문사,보리암,향일암,해동용궁사,낙산사 홍련암, 간월암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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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인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828번길 44 (우)23007
지번삼산면 매음리 629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普門寺 磨崖石佛坐像)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인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석불좌상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네모진 모습이다. 얼굴에 비해 코는 넓고 높으며, 귀는 투박하고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다. 옷은 각이 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손에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을 들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신 뒤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있다. 이 불상은 문화유산적인 가치보다는 성지(聖地)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석불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보문사 향나무 (普門寺 香나무)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보문사의 향나무는 보문사 석실(石室) 앞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3.2m 정도이다. 높이 1.7m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동쪽 줄기의 둘레는 1.3m, 서쪽 줄기의 둘레는 1.5m이다. 나무의 형태는 마치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이 보여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에는 죽은 것 같이 보였으나 3년 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보문사 향나무는 보문사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와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민속문화유산
보문사 맷돌 (普門寺 맷돌)

보문사 삼성각으로 오르는 계단 옆 화단에 있는 맷돌이다. 맷돌은 곡물을 가는데 쓰이는 용구로 위·아래 두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름 69㎝, 두께 20㎝의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부드러운 곡선으로 잘 다듬어 놓았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맷돌은 윗돌만 있으나, 이 맷돌은 윗돌과 아랫돌이 모두 남아 있다. 정확한 제작년도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보통의 맷돌보다 2배 정도 규모가 크다

해동 용궁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418-3 해동용궁사

보통 산속에 있는 보통의 절과 달리 탁 트인 동해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주말과 휴가 시즌에는 외국인을 포함, 외지발 방문객들이 상당히 많이 찾아오는 절이며 시티투어버스 해운대 노선도 이 곳을 경유한다. 오랜 역사의 범어사, 규모의 삼광사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부산에서 가장 이름난 절이다.
부산광역시 문화유산
해동용궁사 금강반야바라밀경론과 목조여래좌상,목조보살좌상을 소장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해동용궁사 목조여래좌상 (海東龍宮寺 木造如來坐像)

해동용궁사 목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의 자세에 오른쪽 손바닥은 바깥으로 하여 어깨 부위까지 들고, 왼쪽 손은 다리 위에 살짝 든 상태에서 1지와 3지를 맞댄 아미타인을 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다리와 몸통 2부분이 결구된 접목조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이등변삼각형의 구도에 넓은 어깨와 무릎 폭으로 안정되고 균형 잡힌 신체 비례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었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17세기 전반기의 시대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특히 방형의 부드러운 얼굴, 왼팔 측면과 다리 가운데로 흘러내린 옷 주름의 끝단이 좌우로 접혀진 점이 특징인데, 이는 17 세기 전반에 전국적으로 활동한 조각승으로, 경상도 지역에 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 현진의 불상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현진은 전국적으로 활동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청헌, 승일, 희장 등의 불교조각에 큰영향을 미친 점에서 조선 후기 조각승의 지역적 계보 연구에 중요한 인물이다. 해동용궁사 목조여래좌상은 1620~30년대 제작된 현진의 작품들의 특징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1640년 이전에 현진이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되며, 조형적 가치가 높고 조각기법이 우수한 작품이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해동용궁사 목조보살좌상 (海東龍宮寺 木造菩薩坐像)

해동 용궁사 소장 목조보살좌상은 균형된 신체비례에서 오는 안정감과 당당한 자세,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미소 짓는 부드러운 인상, 직선과 곡선적인 감각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표현한 간결하면서도 탄력 있은 옷주름 등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조선전기 불상의 조형 감각이 잘 드러나 있는 상이다. 또한 당당한 자세와 비례, 왼쪽 어깨의 삼각형 옷주름과 가슴에 있는 화문 장식, 양 어깨의 반전된 옷주름 등에서 조선전기 16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현재 복장물은 모두 없어진 상태로 이 상에 대한 봉안처, 조각승, 시주자 등의 내용은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전개되는 조선후기 불교조각 흐름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보리암菩提庵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금산(보리암로 665)에 있다.
683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원효대사가 산의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여 보광사를 세웠다. 그 후 이성계가 보리암에 방문하여 기도하였으며, 현종 때 보광사에서 보리암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금의 보리암에 이르게 되었다.
이성계가 아직 장군이던 시절 이 곳에서 기도를 하고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그래서 절 아래에 이성계 기도처로 전해져오는 명승지가 따로 있다.
1971년에 세워진 해수관세음보살상이 유명하여 양양 낙산사, 강화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3대 해수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보리암이라는 암자와 가까운 남해금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보리암전삼층석탑’이라 불리고 있는 3층 석탑으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더욱 유명해졌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독립적인 관음보살상과 선재동자 용왕이 협시한 불감 형식의 작품이다. 현재 불감의 윗 부분은 없어졌고 남아 있는 형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형식은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불감(1637~1644년)을 시작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행하였다.

보리암 관음보살좌상은 통통한 뺨, 보발이 없는 점, 대칭적인 연판 양측 면에 늘어진 옷자락 등에서 조선 전기적 특징을 계승한 조선 후기 17세기 작품으로 판단된다.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한 관음보살 삼존의 도상적 특징을 지닌 점과 사례가 적은 목조불감 형식, 17세기로 추정되는 제작시기 등 자료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불상으로 학술적 가치가 있다.

향일암

향일암(向日庵)은 ‘해를 바라본다’고 해서 붙여진 사찰이름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향일암은 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해를 머굼고 있는 사찰입니다. 해를 바라보는 것은 중생들의 마음이지, 부처님이 상주하는 도량은 해를 품안으로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향일암은 원효대사가 창건당시에는 원통암 그 후 ‘책육암’ ‘금오암’ ‘영구암’으로 불리어 지다가 지금은 조선 숙종 때 인묵대사가 현 위치에 암자를 짓고 향일암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다르게 부를 때마다 그 의미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통암은 사찰의 성격에서 비롯되었고, 책육암은 수행의 뜻으로, 금오암과 영구암은 자연적 지형에 따라 붙은 사명입니다. 향일암은 중생들의 바램을 담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관음기도도량이라는 것입니다.

남해 바다와 바다 속에 솟아오르는 해오름의 정기를 머굼고 있는 향일암은 기도도량이전에 우리들에게 바른 수행을 가르치고 있는 도량입니다. 눈 귀 코 입 피부 뇌 즉 육근의 옮지 못한 행위를 경계하라고 가르치는 도량입니다.

관음기도를 통해 서원을 성취하는 마음과, 일출을 향해 희망을 약속하는 자세는 똑같습니다. 서원과 희망은 기원하고 기도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마음과 바른 자세가 전제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들은 힘들어하였지만 아무런 불평 없이 수많은 계단과 오름을 가로막는 좁은 돌문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자연 앞에 고개를 숙이며 올라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지킨 자만이 해오름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도량이 바로 향일암입니다.



명승
여수 금오산 향일암 일원 (麗水 金鰲山 向日庵 一圓)

해를 향하는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向日庵)은 명칭 만큼이나 해돋이 경관이 아름다워 일출 경관의 명소로 알려져 있음. 거북 모양의 지형과 거북 등껍질 무늬 암석들, 자연암석으로 이루어진 해탈문 등 석문(石門)이 특별하고 울창한 동백나무 숲과 조화되어 빼어난 자연경관을 형성함.

향일암은 원효대사가 원통암(圓通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親見)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곳으로 우리나라 주요 관음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음


낙산사 홍련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소속인 낙산사의 부속암자이다. 낙산사 의상대(義湘臺)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佛殿)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紅蓮)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의상에게 여의주(如意珠)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와 같이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졌던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법당은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역시 법당 밑에 바닷물이 통하도록 하였다. 신라 및 고려시대의 중창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752년(영조 28) 덕린(德麟)이 중수하였고, 1797년(정조 21) 혜근(慧勤)이 중수하였으며, 1802년(순조 2) 청호(晴湖) · 흥운(興雲)이 중수하였다. 1975년 원철(園哲)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낙산사 해수관세음보살상과 의상대



명승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襄陽 洛山寺 義湘臺와 紅蓮庵)
Uisangdae Pavilion and Hongnyeonam Hermitage of Naksansa Temple, Yangyang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 등 낙산사의 곳곳에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낙산사 주요 경관 요소이던 낙락장송이 2005년 강원지역의 큰 산불로 소실되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의상대 및 홍련암 주변 해안에는 시스택(sea stack)이 발달하여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낙산사는 <관동십경>에 옛 모습이 잘 남아있고, <삼국유사>, <동문선>, <동문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많은 시인묵객 등의 낙산사 창건 및 중수 기록과 유람기, 경관을 노래한 시문이 다수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서산 간월암
간월암(看月庵)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암자이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간조시에는 뭍(간월도)과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지형에 세워져 있다.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양식적으로 볼 때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규모가 작은 삼존불상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높이 솟은 보계, 부드러운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하기 시작하는 임진왜란 이후의 보살상과 차별성이 있다.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양식적으로 볼 때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규모가 작은 삼존불상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높이 솟은 보계, 부드러운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하기 시작하는 임진왜란 이후의 보살상과 차별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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