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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장경판전-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인사에 빠져들다.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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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海印寺는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精神的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大乘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화엄경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의 사명寺名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大寂光殿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韓國佛敎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겨울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전경(국가유산 포털)

해동제일도량
홍하문

보물
합천 해인사 홍하문 (陜川 海印寺 紅霞門)


「합천 해인사 홍하문」은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457년(세조 3)에 중수 이래 지금까지 다섯 차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세조의 지원 아래 해인사가 확장하는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척기(1691~1767)의 ‘유가야산기(遊伽倻山記)’ 기록과 정선(1676~1759)이 부채에 그린「해인사도」와 김윤겸( 1711~1775)의 「해인사도」 등을 보아 적어도 18세기에는 일주문인 홍하문, 그 다음에 봉황문, 해탈문이 차례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면에는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현판과 내부 중앙에 ‘홍하문’ 현판이 걸려있으며, 배면에는 ‘해동제일도량(海東第一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합천 해인사 홍하문」은 정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 평방(기둥 위에 가로로 놓여 지붕을 받치는 부재)에 6개 공포, 전체 14개 공포를 올린 다포식 공포 구조로 서까래와 부연이 있는 겹처마 지붕이다. 기둥은 주기둥 옆에 부재를 X자형으로 보강하여 지붕을 지지하는 형태로 구성했다. 맞배지붕을 한 일주문은 정면기준 주로 5개 공포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이 일주문은 6개 공포를 올려 상대적으로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공포의 짜임 등이 조선전기의 강직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 맞배지붕 : 지붕면의 앞뒤로만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리는 지붕으로 옆에는 판재를 이어 붙여서 비바람을 막음.

해인사 홍하문(즉 일주문)을 들어가면서 주련에  옛날 글씨체로 예쁘게 쓰인 글자를 보면서 무슨 뜻인가?
생각을 한 분 들이 많을 것이다. 그 예쁜 글씨의 해석이다.



팔만대장경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Printing Wood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in Haeinsa Temple, Hapcheon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아미타경 전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아미타경 후면


수다라장/쑷뜨라(산스끄리뜨어)는 경전을 말한다.
팔만대장경/장경각/보안당 글자는 달라도 의미는 비슷하다.

국보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Janggyeongpanjeon Depositories of Haeinsa Temple, Hapcheon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려목판

국보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陜川 海印寺 高麗木板)
Printing Woodblocks of Miscellaneous Buddhist Scriptures in Haeinsa Temple, Hapcheon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되어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고려시대 판화 및 판각기술은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상 및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해인사 고려 각판
해인사 고려 각판

각판을 본다.
경전에 한 글자를 깎으면서
한 호흡에
우주를 싣는다.
담가진 우주는 겨자씨 속으로
들어 가는데
어째 늘어만 가는 팔만사천번뇌여
깎아도 깎아도
줄어들질 않네.
해인의 삼매여
끝없는 수행이여.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Dry-lacquered Seated Statue of Buddhist Monk Huirang at Haeinsa Temple, Hapcheon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신라 말∼고려 초에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希朗大師, 10세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초상조각[祖師像;僧像]으로서,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으나,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이 작품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남아 있다. 희랑대사는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으로,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하며 태조 왕건(王建)의 스승이자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희랑대사좌상’은 조선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奉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가야산기(伽倻山記)」등 조선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 있어 전래경위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든 당시 제작기술이 잘 남아 있고 뛰어난 조형성을 지닌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이렇듯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의 예처럼 신라∼고려 초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조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다. 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신륵사 조사당 목조나옹화상’(神勒寺 祖師堂 木造懶翁和尙, 1636년), ‘부석사 조사당 소조의상대사상(浮石寺 祖師堂 塑造義湘大師像, 고려 말∼조선 초)’, ‘괴산 각연사 유일대사상(槐山 覺淵寺 有一大師像, 조선 후기)’ 등 다른 조사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의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마치 살아생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가슴에는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는 그의 별칭을 상징하듯,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흉혈(胸穴)은 해인사에 전래된 설화에 의해 희랑대사가 다른 수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승의 흉혈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유사한 사례를 ‘북한산 승가사 승가대사상’(1024년, 보물)에서도 볼 수 있다. 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지금까지 ‘희랑대사좌상’이 거의 유일하게 알려져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실제 인물처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희소성ㆍ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자,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인류문화사적으로 의의가 높고 역사적ㆍ예술적ㆍ학술적 가치가 탁월하므로 국보로 지정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국보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陜川 海印寺 法寶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및 腹藏遺物)
Wooden Seated Vairocana Buddha and Enshrined Votive Offerings in Beopbojeon Hall of Haeinsa Temple, Hapcheon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원래의 봉안전각은 알 수 없으나 한동안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었다가 지금은 주불전인 대적광전의 오른쪽에 위치한 대비로전(大毗盧殿)에 봉안된 불상과 그 복장유물이다. 불상의 제작 시기는 불상의 양식과 도상,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는 해인사가 802년 창건된 사실에 비추어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이 해인사 창건시기와 크게 멀지 않은 시점에 조성되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서 그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을 말해 준다.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옷차림,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의 주름, 원만한 얼굴과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표현 등은 9세기 석굴암 불상 양식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팽팽한 근육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탄력감은 신라 전성기 미적 감각과 양식적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시대 전성기 불상을 연상케 할 만큼 조각적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중앙에서 활동하던 신라조각가들이 지방의 중요 왕실사찰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활약한 상황을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와 더불어 상의 재료가 보기 드물게 향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주목된다. 이는 향나무가 우리나라 목조불상의 대다수가 소나무나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차별되는 양상이다.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구와 고려시대의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방식을 보면, 불신(佛身)은 하나의 원통형 나무로 만들고 뒷부분에 나무를 덧대었으며, 머리와 팔은 따로 만들어 접목하였다. 나발(螺髮)은 흙으로 별도로 만들어 붙인 점에서 고려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접목기법의 시원적 방식을 보여 준다. 불상과 더불어 복장유물 또한 한국불교사,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이다. 해인사는 1489∼1490년 동안 조선왕실의 후원을 받은 당대 최고의 고승(高僧) 학조(學祖, 15세기)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복장유물에는 고려∼조선 등 여러 시기 불상의 중수과정에서 추가로 납입된 귀한 전적과 직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490년 중수 복장유물은 조선 초기 왕실 발원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복장에서 나온 후령통은 원래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16세기 『조상경(造像經)』의 시원이 된 복장 안립 물목의 종류와 안립 절차에 대해 규명하게 된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러한 복장유물의 물목과 체계를 통해 당시 해인사의 위상과 왕실불사의 수준 그리고 고려∼조선 초기까지 복장 납입 및 불상의 중수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국보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陜川 海印寺 大寂光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및 腹藏遺物)
Wooden Seated Vairocana Buddha and Enshrined Votive Offerings in Daejeokgwangjeon Hall of Haeinsa Temple in Hapcheon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현재 해인사의 주전각인 대적광전에 봉안되었으나 지금은 그 오른쪽에 위치한 대비로전(大毗盧殿)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과 그 복장유물 일괄이다.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교해 크기, 제작기법 등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인 9세기말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서 그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을 의미한다. 복장유물의 조성시기는 고려∼조선 초기에 걸쳐 있다. 이는 해인사가 802년 창건된 사실에 비추어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이 해인사 창건시기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조성되었으며, 여러 차례 개금 중수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복장유물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왕실의 후원 아래 조성된 것으로, 귀한 전적과 직물들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 초기 왕실 불사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당당하고 균형잡힌 신체, 몸에 밀착된 편단우견의 법의, 자연스럽고 탄력 있는 옷주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수인(手印)을 한 것이 특징이다. 불상의 재료는 향나무로서, 우리나라 목조불상의 대다수가 소나무, 은행나무인 것과 차별되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우리나라 불상 중 향나무로 만든 불상으로는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구와 고려시대의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알려져 있다. 제작기법을 보면, 불신은 하나의 원통형 나무로 처리하였고 머리와 팔은 따로 만들어 접목하였다. 나발(螺髮) 역시 흙 등으로 별도로 만들어 촘촘하게 부착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이후 등장하는 접목기술의 시원적인 방법을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이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지닌 상으로 조성 당시부터 지금까지 해인사의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존속되어 왔다. 이 불상은 802년 창건된 해인사에 남아 있는 9세기의 귀중한 유물이라는 점과 당시 해인사의 화엄사상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ㆍ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복장유물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납입된 물목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불상의 중수 내력 및 불교사적인 특성, 해인사와 왕실과의 관련성, 복장유물의 안립 방식 등이 확인됨에 따라 뛰어난 학술적 가치가 증명된다. 이러한 사유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뛰어난 조형성과 역사성은 물론 종교적인 이상미를 갖춘 우수한 불상으로 판단되므로, 복장유물과 함께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법보전 불상/대적광전 불상 구분법: 1.왼손을 잡고 있는 위치와 모습이 조금 다르고. 2, 복장 유물로 판단(직물이냐, 후령통이냐) 3, 불상의 상부에 조성 된 공포의 위치가 차이가 있다.

자료출처: 국가유산 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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