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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북의 사찰

대웅전을 찾아-불영사 대웅보전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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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계곡
울진군 근남면에서 금강송면 불영사에 이르는 곳으로, 계곡을 따라 그림 같은 자연 경치를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와 낭떠러지가 많아서 특별한 이름이 붙은 것만도 30개에 이른다. 불영사는 구룡폭포 근처 금강소나무 숲 속에 있는데,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보물 응진전 등 문화유산과 함께, 보기 드문 꼬리진달래, 백리향을 비롯, 560 종류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조류 11종, 어류 42종, 포유류 17종, 나비 30종, 거미류 94종 등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불영사

여리디 여린 사미니가
고향 그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이
계곡을 적시고.

돌아 돌아 또 돌아야 하는 곳.

새끼 나무는
장대같은 금강송이
사천왕 문을 지키듯
보듬고

노승은 가만히 눈을 내리 깔아
침묵속에 우주를 삼킨다.

여린 사미니는
범종 소리 내릴 때
부처님전 사시 마지를 올린다.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대웅보전은 절에서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중심 법당을 가리키며 지금 있는 건물은 안에 있는 탱화의 기록으로 영조 11년(1735)에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씩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각 공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건물에 색을 칠한 단청 부분을 들 수 있는데 바깥쪽은 다시 칠하여 원래 모습을 잃었지만 안쪽은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천장 부분을 비롯한 벽, 건물을 지탱하는 굵직한 재료들에 그림을 그린 기법들은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축양식과 기법연구, 격조 높은 불교그림과 단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조선 후기 건축물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불영사삼층석탑 (佛影寺三層石塔)
불영사 내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으며, 몸돌의 각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받침)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을 이루고 탑으로, 기단의 조각수법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보물
불영사 영산회상도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대개 불상의 뒷벽에 위치한다.

이 영산회상도의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의 옷을 걸쳤으며,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 석가여래 주변으로 10대 보살, 사천왕상, 상단의 10대 제자 등이 배열되어 있다. 주로 영산회상도에서는 8대 보살이 그려지는데, 이 그림에서는 10대 보살을 표현한 점과 석가불 아래의 그 보살이 유난히 큰 점이 특징이다. 석가의 옷이 붉은색이고 석가 뒤의 광배가 이중으로 붉은 테를 두른 점등은 조선 후기의 불화양식보다 약간 앞선 양식적 특징이다. 채색의 사용법이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조선 영조 9년(1733)에 그려진 이 그림은 격조 있는 양식, 양호한 보존상태 등으로 18세기 초 조선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울진 불영사 불패 (蔚珍 佛影寺 佛牌)

불영사에는 불패 2기가 대웅보전 안에 있다. 불패 1은 좌대와 패싱으로 나누어지는데, 패신 앞면에는 ‘우순풍조 국태민안(雨順風調 國泰民安)’이라는 글자(원래 한글로)가 적혀 있으며, 액자 주위로는 황용과 운문 등 화려한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크기는 높이 71.8 × 폭 40.5cm이다. 불패 2는 좌대는 결실(현 복원됨)되고 앙련대와 패신 만 남아있는데, 중앙의 액자에는 명문을 확인할 수 없으며, 주위로 봉황, 운문과 꽃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크기는 높이 34 × 폭 24.2cm이다. 불패 1의 패신 뒷면에는 불패를 조성하게 된 발원문이 묵서 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불패(佛牌) 3위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 3위를 1678년(조선 숙종 4)에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2점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 외부 귀공포

대웅전 외부 공포

우물천장

대웅전 내부 귀공포


불영지

부처상이 불영지에 비추어져 나타난다.

불영사와 인현왕후이야기

조선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 민 씨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따님으로 30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인경왕후의 다음 왕비로서 대비전이 친히 중전으로 간택한 왕후이며, 가례를 지낸 지 6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으므로 크게 걱정하여 스스로 왕께 후궁을 간택할 것을 아뢰었으나, 왕께서는 왕후의 나이가 어림을 이유로 후궁을 맞기를 주저하니, 몇 차례의 간곡한 아룀에 마지못하여 후궁 간택의 전교를 내리고 희빈 장 씨를 맞이하였다.

  희빈 장 씨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3개월 만에 태기가 있어 10개월이 지난 뒤 원자를 탄생하였으니 임금의 총애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희빈 장 씨는 자기가 귀히 되었음이 민후의 후덕함에 있음을 고맙게 생각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왕의 총애를 기화로 민후를 모함하게 까지 되었다. 처음에는 왕께서 민후의 어지심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귓가로 흘렸으나 그 모함의 횟수가 더해지자 차츰 민후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궁중의 생일에 왕께 진어 할 상을 민후가 손수 들여갔더니 왕이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 후 2품 이상의 조관을 불러 중전의 실덕함이 많으니 폐출하겠다고 하였다. 신하의 상소와 직언에도 불구하고, 비망기를 내려 "민중전은 본래 어질더니 희빈이 원자를 탄생함에 있어 시기하는 마음에 기뻐하지 않을뿐더러 여러 가지 못된 일을 꾀하고 있으므로 내쫓아야 한다"라고 하며 민후를 폐출하고 말았다. 민후는 안국동의 감교당에서 죄인을 자처하여 스스로 잡곡밥을 들고, 색옷을 입지 않았다.

  이렇게 5년이란 세월을 눈물로 보내다가 마침내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 그릇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한 백발 노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이 온데 마마께옵서 괴로우시더라도 3일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인지라,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3일을 더 기다렸더니 과연 노승의 말과 같이 왕께서 복위시킨다는 전갈이 왔고, 다시 왕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민비는 꿈이 너무도 신기하여 왕께 아뢰어 불영사에 사람을 보내어 꿈에 나타난 백발 노승의 화상을 그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는데 사자가 불영사에 와서 찾아보았으나 노승은 간 곳이 없고, 1516년(중종 11년)에 돌아가신 양성법사의 화상이 그와 같으므로 복사하여 민비께 드리니 민비께서 보시고, 현몽한 노승이 틀림이 없으므로 임금께 이 사실을 아뢰었더니 숙종께서 감복하시고 부처님의 은공을 갚기 위해 불영사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산과 전답을 불영사에 시주하였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 (蔚珍 佛影寺 佛輦)

울진 불영사 불연’은 1670년(현존 11) 화원(畵員)으로 추정되는 광현(廣玄), 성열(性悅), 덕진(德眞)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불연(佛輦)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작품이다. 불연은 불가(佛家)의 불보살, 사리, 경전, 불패, 영가 등 예배의 대상을 의식도량으로 모셔오는 시련의식(侍輦儀式)에서 쓰이는 매우 중요한 의식법구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불연 유물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이며, 그중에서도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이러한 점에서 ‘울진 불영사 불연’은 2기 모두 1670년이라는 분명한 제작시기와 화주(化主) 학종(學宗) 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하게 되는 동기와 배경, 그리고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의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균형미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세부 조형에 있어도 나무로 얽어 만든 궁륭형 지붕과 봉황조각, 청판머름 조각, 가마채의 용두장식, 난간 장식 등에서 보이는 조형미와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특히, 불연의 몸체 주렴(珠簾)에 동경(銅鏡, 거울)을 매달았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로, 이는 불상의 양면원경(兩面圓鏡)이나 불화 복장낭(腹藏囊) 앞에 매단 동경과 같이 무명(無明)을 밝혀주는 역할과 불교적 상징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불교 의례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의례사적 의미가 크다. 이밖에 황동과 주석, 철 등 재료를 달리 한 금속재료를 사용해 섬세한 제작의도가 돋보이며, 지붕과 몸체 곳곳의 장석(裝錫)과 보석을 단 장식 등을 통해서도 당대 뛰어난 장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불교공예품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불연 중 제작 당시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제작배경을 소상히 담은 기록이 남아 있고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사례로는 단연 불영사 불연이 대표적이다.(이미지, 글 일부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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