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여는 건타라국
가섭미라국(카슈미르)에서 서북쪽으로 멀리 산을 두고 한달을 가서 건타라국(建馱羅國, 간다라 Gandhära)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왕과 군대는 모두 돌궐(突厥) 사람이다. 토착인은 호인(胡人)이며 바라문(婆羅門, 브라만Brahmana) 종족도 있다. 옛날에 계빈( 카피쉬kapisi) 왕의 치하에 있었던
나라다. 돌궐의 왕 아야(阿耶)가 군대를 이끌고 와 계빈왕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돌궐 병력이 강해져 계빈 왕을 죽이고 스스로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제패한 돌궐 패왕(覇王)이 되었다. 이 나라 북쪽이 모두 그의 수중에 있었다.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풀과 나무가 없다. 옷 입는 복장이나 풍속, 언어, 절기는 모두 다르다. 옷은 가죽 외투와 모직 적삼, 가죽신, 바지 종류다, 땅은 보리와 밀이 잘 되고 기장이나 조, 벼는 전혀 없다. 사람들은 보릿가루나 빵을 많이 먹는다. 가섭미라와 대발률, 소발률, 양동 등의 나라를 제외하고 건타라국이나 오천축, 곤륜(崑崙) 같은 나라에는 포도는 전혀 없고 사탕수수는 있다. 여기 돌궐 왕은 코끼리 5마리를 가지고 있으나 양과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낙타와 노새,
당나귀 등은 매우 많다. 땅은 호인들과 ..돌아서 지
나가지 못한다. 남쪽으로 가면 길이 험악하고 물건을 빼앗는 도적들이 많다.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 가면 나쁜 짓을 일삼는 자들이 많으며 시장과 가게에서는 도살하는 일이 매우 흔하다.
여기 왕은 돌궐 사람이지만 삼보를 깊이 믿고 공경하며 왕과 왕비, 왕자, 수령들은 각기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한다. 왕은 해마다 두 차례씩 무차대재(無遮大齋)를 열어 몸에 지니고 애용하던 물건과 처, 코끼리, 말 등을 모두 희사하여 시주를 한다. 오직 처와 코끼리만은 스님들에게 가격을 매기게 하고 그 값을 치르고 도로 찾아온다. 그 밖의 나머지 낙타와 말, 금과 은, 옷가지,
가구(家具)는 스님들이 팔아서 스스로 이익을 나누게 한다. 왕이 이렇게 하는 것이 북쪽의 다른 돌궐 왕들과 같지 않은 점이다. 자녀들도 또한 그렇게 하여 제각기 절을 짓고 재를 열어 희사하고 시주를 한다.
이 나라의 성은 인더스 강이 굽어보이는 북쪽 언덕
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에서 서쪽으로 사흘 가는 거리에 큰 절이 하나 있다. 바로 천친 보살(天親菩薩. 바수반두Vasubandhu)과 무착 보살(##. 아상가 Asang)이 머물던 곳으로서, 이 절 이름은 갈락가( 카니슈카Kaniska)이다. 절에 큰 탑이 하나 있어 늘 빛을 발한다.
이 절과 탑은 옛날 갈락가 왕이 만든 것이라 왕의 이
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또 이 성 동남쪽으로
얼마 되는 곳에 부처님이 과거에 시비왕(시비카
Siwika)이 되었을 적에 비둘기를 구제한 곳이 있다. 지금도 절이 있고 스님들도 있다. 또 부처님이 과거에 머리와 눈을 던져 다섯야차 (五夜叉)씨에게 먹이로 주었다는 곳도 모두 이 나라 안에 있는데, 이 성 남동쪽 산 속에 있다. 그곳도 절과 스님들이 있어 지금도 공양하고 있다. 이 나라도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원문(혜초)
譯/지안
건타라국은 오늘날 파키스탄의 간다라 지방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더 자세히 말하면 파키스탄의 라왈핀디(Rawalpind)와 페샤와르(Peshawar)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포함한 인도의 펀잡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이다. 인도 역사에서 보면 마우리아 왕조(BC.321~181년) 제3대 왕인 아쇼카 왕이 인도전역을 통일하고 불교를 크게 신봉하던 무렵에 간다라 지방에
불교가 전파되었다. 이 지역에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이 싹트기 시작하여 불상과 불화 둥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 인도로 건너간 여러 스님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기록한 글들이 남아 있는데 시대에 따라 기록에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인도에 간 법현(法顯)은 402년 여름에 이곳에 들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120년 쯤 뒤에 북위(北魏) 효명제 때 사신으로 인도에 간 송운(宋雲 )이 520년 4월에 이곳에 이른다.
송운은 이 나라 이름을 업파국(業波國)으로 표기하고 그가 이곳 왔을 때는 이 나라가 에프탈에게 멸망하여 2대째 에프탈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미하라쿨라 왕은 포악하여 불교를 믿지 않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백성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경전을 즐겨 읽는다고 하였다.
현장이 이곳을 찾은 때는 송운 이후 100년이 지난 때였다. 현장은 이 나라의 크기를 동서가 1,000여 리이고 남북이 800여 리나 되며 동쪽으로 신도하(信度河, 인더스 강)에 접해 있고 대 도성인 포로사포라 (布路沙布羅)는 주위가 40여 리에 달하며 가필시국 (계빈국)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혜초 다음에도 당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신 장도광을 따라간 오공(悟空)이 753년 건타라국에 갔다. 그때 이 나라가 계빈국 동부의 한 도성이 되어 왕이 여름에는 이곳에 와서 머물고 겨울에는 계빈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사신 장도광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오공은 병이 들어 돌아오지 못하고 님아 있다 출가
승이 되어 근본 율의를 익히고 범어를 배운 후 천축 전역을 유행하며 부처님 성지를 두루 참배하다가 789년 범본 십지경(十地經)
등 많은 경전을 가지고 당나라로 귀국한다. 그 후 왕명에 의해 가지고온 경전을 번역하였으므로 역경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바라문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4가지 종성 가운데 가장 상위에 있는 신분으로 범천을 섬기며 제사를 주관하는사람들이다.
■계빈은 간다라 서북쪽 카불강 유역에 있던 카피시Kipis인데 당(唐)나라 초기 50년 간 천축에 들어간 스님들의 구법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의정(義淨)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 과 현장의 [대당서역기] 에는 가필시로 표기되어 있다.
■곤륜(崑崙)지명 (地名)으로 나오는 경우와 족명(族名)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나라 이름으로 나왔다. 중국 서부에 있는 큰 산으로 신강성 천산남로의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곤륜 산맥을 가리키는데 이 산맥 일대인 파미르 고원지대를 곤륜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라를 가리킬 때는 중국 남해에 섬지역의
여러 나라를 통칭하여 곤륜이라고 불렀다. 또 중국에서 삼국시대 이래 이 곤륜 출신의 노예들을 곤륜노(崑崙奴)라고 불렀으며 얼굴
색이 검은사람을 곤륜노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돌궐족은 한때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여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던 때도 있었다. 이 민족은 원래 불을 섬기는 배화교를 믿었기 때문에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불을 숭상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차대재(無遮大齋)는 무차대회 (無遮大會) 혹은 반차대회(般遮大會)라 부르기도 했던 말로 범어 어원은 판차바르쉬카(pancavainika)
이다. 음사하여 반차바률사가라 쓰기도 한다. 빤짜는 5를 뜻하고 바르시카는 년(年)을 뜻하는 말로 5년에 한 번 하는 행사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차대회란 5년에 한 번씩 승속
이나 남녀, 귀천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음식을 나눠 먹고 법문을듣는 재시(齋施)와 법시 (法施)를 베푸는 불교의 대 법회를 말한다.
이 법회가 후대에는 해마다 열리는 경우도 있었다. 원래 재(齋)란 음식을 제공하여 먹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도의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인 인더스 강을 한역에서는 신두하(辛頭河) 혹은 신도하(信度河)라 표기하고 있다.
■천친(天親 ) 보살과 무착(無着) 보살은 AD. 4~5세기에 생존했던 인물로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 (唯識思想)을 확립
시킨 사람들이다. 앞의 제13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두 사람은 형제로 무착이 형이며 천친은 동생이다. 범명(梵名)이 무착은 아상가 (Asangha) 이고 천친은 바수반두(Vasubandhu) 이다. 바수반두
를 세친(世親)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일설에는 천친은 오역이고 세친이 옳은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이두 형
제는 간다라국의 수도 푸르사푸라의 한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브라만 사상에 젖어 있었으나 뒤에 불교에 귀의 출가하여 소승의 공부를 하다가 대승으로 전향하였다. 먼저 형무착이 불교로 개종하여 소승의 교법을 연구하다가 나중에 대승의 교법을 연구하고 다시 동생 세친을 대숭으로 전향할 것을
권하였다. 무착은 아유타국(아요다Ayodha) 에서 미륵(彌勒,마이트레야Maitreya)을 만나 미륵으 로부터 대승의 요의(了義)를 듣고 [금강반야바라밀경론][현양성교론]등 논서를 저술하고 유식불교의 대의를 전파하였다.
동생 세친도 처음은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공부하고 [아비달마구사론]을 짓는 등 소승교의에 관한 논서들을 저술하다가 형 무착의 권유에 의해 대승을 다시 공부하여 [대승백법명문론][ 불성론] 등 대승의 사상을 담고 있는 논을 지었다. 후세에 와서 세친을 천부논사라고불렀다.
■갈락가사는 쿠산 왕조의 제3대 왕인 카니쉬카
Kaniska) 왕이 푸르사푸라에 세운 절이다. 카니쉬카를 음사하여 가니색가 또는 갈락가라고 표기해 왔는데 바로 왕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카니쉬카 왕은 인도 역대 제왕 가운데 독실하게 불교를 믿고 외호하여 불교와 학문을 장려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제2의 아쇼카 왕이라고 부른다.
■본생담(本生譚)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시비왕이었을 때 매에 쫓긴 비둘기를 구해 주어 부처가 될 수 있는 자비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현우경J과 [보살본행경]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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