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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란 물건의 무게를 알아보려
천년 세월에
물어본들
번뇌는 무게가 없다.
다만 한 동안 지친 심신을
놓아 버리려
탑 앞에 섰다.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여진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석탑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단아(端雅)한 3층 정형탑(定型塔)을 세웠다. 이 탑은 원래 문경군(聞慶郡)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도천사(道川寺) 절터에 있던 것을 1974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상륜부(相輪部)는 1976년 복원한 것이다. |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이다. 1974년 대웅전 앞 3층석탑 2기와 함께 경상북도 문경 웅창마을 북방 금강가의 옛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바닥돌은 넓적하게 짜여져 있으며, 그 위로 여러 장의 석재를 조성한 2단의 높직한 괴임을 두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몇 개의 널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한 편으로 밑면의 받침을 5단씩 두었고, 날카롭게 들린 네 귀퉁이로 인해 경쾌함이 느껴진다. 탑신의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매우 높으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한 세련된 모습으로,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석탑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단아(端雅)한 3층 정형탑(定型塔)을 세웠다. 이 탑은 원래 문경군(聞慶郡)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도천사(道川寺) 절터에 있던 것을 1974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상륜부(相輪部)는 1976년 복원한 것이다. |
강락사라고 전해지는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을 탑신(塔身)을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한 돌로 짜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각 층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였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년 탑을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각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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