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선암사는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이라 칭하고 사찰명을 해천사라 하였다. 그 후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
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후대에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께서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셨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선암사 일주문은 단칸 맞배지붕과 주상포, 주간포의 다포식 공포로 되어있다. 축부(軸部/ 기둥 부분)는 양팔보(기둥과 창방으로 단순하게 구성된 T자형) 형식으로 되어있으며, 창방(기둥머리에 가로로 맞추는 목재) 전체 배치형식은 ‘口’자형이다. 주기둥 옆에는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은 뒤에 횟가루로 표면을 마감한 짧은 담장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둥은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직경이 작아지는 민흘림 형식이다.
내부 의장은 특별하게 장치한 것은 없으나 2001년에 주기둥 내측 상부에 용두(龍頭)를 추가 한 것을 들 수 있다. 일주문 내부에 용두로 장엄을 베푼 예는 대구 동화사 일주문과 장흥의 보림사 일주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사찰은 천장에서 용두가 내려와 있어 선암사의 용두를 기둥에 거는 방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순천 선암사 일주문은 초창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확인된 중창 이후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피해 유일하게 소실을 면한 건축물로서 조선 중기 건축물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그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일주문 형식에서 양팔보형은 순천 선암사 일주문과 북한의 안변 보현사 일주문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2개의 사례가 존재한다.<출처 -문화유산포털>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보성 벌교 홍교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출처-문화유산포털>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출처 문화유산포털>
선암사의 대변소 건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순천 선암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1988년 천불전 보수시 발견된 뒤 현재는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발견 당시 도금이 퇴색된 것을 새롭게 도금하였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그 형식은 삼산관(三山冠)형태이다. 중앙에는 화불(化佛)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보관은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장엄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장식성은 중국의 명말 청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호는 넓적하고 평평하여 라마교 불상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눈썹과 눈은 양편 귀의 윗쪽으로 치켜세워져 있으며 콧날은 오뚝하고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은 매우 가는 편인데 삼도가 보이며 그 양편에는 연주문이 장식된 둥근 귀걸이가 양 어깨위에 걸쳐있다. 천의는 양편 어깨에 걸쳐있는데 그 밑으로 U자형의 영락이 양쪽 젖무덤 위로 늘어져 있다. 상반신의 앞면은 완전히 피부를 드러낸 채로 표현되었고 등 뒤에는 두꺼운 천의자락이 상체를 덮고 있다.
수인은 아미타여래가 갖는 9품인 가운데 하품 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앉은 자세는 우측발이 밖으로 나오고 좌측발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상좌를 취했다. 군의자락이 양 무릎을 덮고 있는데 그 옷 주름이 매우 역동적이다. 팔목과 팔꿈치에 두 줄의 팔찌를 끼고 있으며 역시 발목에도 발찌를 걸치고 있다. 양무릎 중앙 전면에 부채살 모양의 군의자락이 주목된다. 대좌는 앙복련(仰伏蓮)이 중대 없이 바로 연결된 연접형식이다. 대좌의 상하단에는 19엽의 단판 연화문이 장식되었고 상하단의 연화문 외곽으로는 아주 미세한 연주문이 장식되었다.
순천 선암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화려한 몸치장 그리고 영락, 대좌의 연접형식 등에서 고려후기에 나타난 라마교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조성연대가 14∼15세기로 추정된다. 라마교는 중국의 서역인 티벳트는 물론 내몽고, 네팔 등지에서 성행했던 밀교적 색채를 띤 불교의 한 종파를 말한다. 이러한 고려후기에 발달했던 라마교적 요소가 국내의 석탑(마곡사5층석탑)뿐만 아니라 금동사리탑, 특히 금동불에서도 상당량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선암사금동관음보살상은 14∼15세기경 라마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출처 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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