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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95

탑과 석등 이야기-16(경주)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2024. 4. 22.
탑과 석등 이야기-15(서울의 탑) 서울의 문화재를 살펴보면서 의아스러운 생각을 가진 것은 전통 사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타지역에 비하여 문화재급 석탑이 너무도 적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이유가 숭유억불정책에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탑들도 대개는 폐사지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시골 촌놈것을 그냥 빼앗아 왔다고나 할까? 외국으로 수탈당한 문화재는 환수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도 우리 안에서는 지극히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좀처럼 이해되질 않는다. (글, 이미지 출처 문화유산포털) 보협인석탑 (寶篋印石塔)/국보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습인데, 중국 오.. 2024. 4. 21.
탑과 석등 이야기-14(관세음보살) 양양 낙산사7층석탑/보물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 2024. 4. 21.
탑과 석등 이야기-13(목탑의 향기) 분황사모전석탑,국보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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