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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남의 사찰

봉명산 다솔사-85

by 돛을 달고 간 배 2006.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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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 기슭에 있는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연기조사가 처음 짓고 영악사라 하였다. 선덕여왕 5년(636)에 절을 늘려 짓고 다솔사라고 부르다가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영봉사라 하였다. 경문왕(재위 861∼875) 때 도선국사에 의해 다시 다솔사로 부르게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숙종 6년(1680)에 다시 지었다. 지금 남아있는 대양루는 영조 24년(1748)에 지은 것이다.

대양루는 다솔사의 본전인 대적광전과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있는 2층 누각으로,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고 절의 행사 때 사용하는 도구나 그릇을 보관하기도 한다. 보통 절의 누각은 윗층은 마루·아랫층은 문으로 이용하는데, 대양루는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앞면 5칸·옆면 4칸의 규모이며,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방풍판을 달았다. 대적광전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나 좌우 양쪽과 뒷쪽에 벽을 설치하여 막았고, 뒷쪽에는 문을 달아 밖의 경치를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앞마당과 누각 마루는 떨어져 있고 오른쪽 퇴칸 앞으로 돌다리를 걸쳐 출입하고 있다.

다솔사 대양루는 매우 견실한 느낌을 주는 누각건물이다.











다솔사는 독립운동의 거점지이자 현대 차문화의 산실로 근대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찰이다. 효당 최범술과 만해 한용운이 이곳과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거점지와도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에는 단지 불교인뿐만 아니라, 당시 우국지사와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효당 스님은 1934년부터 다솔사에 초등과정의 광명학원(光明學園)을 세워 그 인근의 농민자제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는데, 그 학원의 강사는 김동리가 주로 담당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과 불교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대표적 소설인 등신불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또한 효당 스님은 『韓國의 茶道』라는 한국 최초의 차도 개론서를 저술하였으며, 다솔사에서 재배하는 차를 독특한 제다법으로 반야로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생산하고 전수시키는 등 효당스님은 현대 차문화를 확립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지금도 다인들 사이에서 다솔사는 차문화 유적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관람포인트

1. 다솔사는 울창한 숲으로 경치가 수려하여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등산코스가 좋고 해발 300m가 넘는 봉암산, 봉명산, 천왕산들을 연결되어 있으며 국립공원인 다도해를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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