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 지눌이 처음 지은 사찰이다. 나라가 번성하면 이 절도 함께 번창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아 이름을 흥국사라 하였다. 불법 그 자체보다는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의미가 강한 절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던 기도처로의 역할이 컸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이 모셔진 법당을 말하며,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조선 명종 15년(1560)에 크게 다시 지어졌다가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앞쪽과 양쪽에만 있고 건물의 뒷쪽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흥국사 원통전은 선암사 원통전과 함께 사찰건물로는 특이한 양식에 속하는 건물이다(시도유형문화재45호)
흥국사 입구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이다.(보물563호)
개울 양 기슭의 바위에 기대어 쌓았는데,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틀어 올린 다리밑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을 이루고 있다. 양옆으로는 둥글둥글한 돌로 쌓아올린 벽이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뻗쳐 조화를 이룬다. 홍예의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돌이 튀어 나와,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마치 용이 다리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다리로, 지금까지 알려진 무지개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길며, 주변 경치와도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둥근 몸광배에 싸인 정면관(正面觀)의 수월관음(水月觀音)을 중앙에 큼직하게 그린 다음 오른 무릎 아래 쪽 한 켠으로는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합장하고 서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배치하고, 맨 하단에는 일렁이는 물결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양팔 좌우로는 쌍죽 및 정병과 청조를 그려놓아 관음보살이 금강옥석 암좌에 앉아 문수보살의 지시에 의하여 구도 여행을 하는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수월관음도 도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관음도의 전형을 잘 따르고 있는 정면관 관음도로서, 부분적으로 도식적인 면이 엿보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짜임새 있고 안정된 구도에 적·녹·청색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의 색채와 정교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세련된 필선, 단정하고 적당한 얼굴표현과 신체비례, 바위면 처리에 있어 회화성 넘쳐나는 표현 기법 등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18세기의 유명한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불화로서 비록 화면 하단부에 일부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구도가 매우 안정되고 필선이 섬세하며 색채의 조화가 뛰어난 조선 후기의 수작(보물1332호)-흥국사수월관음도
이 건물(建物)은(보물396호) 흥국사의 본전(本殿)으로 외벌대의 장대석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집이다.
건물의 앞면에는 모두 궁창판(穹蒼板)이 있는 사분합(四分閤)의 격자교살문(格子交箭門)을 달고, 그 위로는 교살창을 달아 아름답게 꾸미었다. 기둥에는 약간의 배흘림이 있고 그 위로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돌려 내외3출목(內外三出目),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포작(包作)을 짰고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활주(活柱)로 추녀(春舌)를 받쳤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짜고 중앙 뒤쪽으로 불단(佛壇)을 놓아 석가삼존(釋迦三尊)을 봉안(奉安)하였고, 숙종(肅宗) 19년(1693, 강희(康熙) 32년)에 그려진 석가후불탱화(釋迦後拂幀화)는 보물(寶物) 제578호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불단(佛壇) 위로는 화려한 닫집을 짜서 감실(龕室)을 만들었고, 천정은 모두 우물반자를 짰다. 건물의 전체적인 가구수법(架構手法)과 후불탱화(後拂幀)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朝鮮) 중기(中期) 이후의 건물로 추정(推定)된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탱화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4.27m, 세로 5.07m이다. 탱화는 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탱화는 화면 중앙에 있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앞쪽 양옆으로 여섯 명의 보살들이 배치되었고, 그 옆으로는 사천왕을 거느리고 있다. 석가여래상의 바로 옆과 뒤편으로는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따르는 무리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은 왼쪽 어깨에 옷을 걸쳤고,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 모습이다.
채색은 대체로 붉은색과 녹색으로 이루어졌는데, 머리광배의 녹색은 지나치게 광택이 있어 은은하고 밝은 맛이 줄어든다. 그러나 꽃무늬나 옷주름선 등에 금색을 사용하고 있어서 한결 고상하고 품위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숙종 19년(1693)에 왕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천신(天信)과 의천(義天) 두 승려화가가 그린 이 탱화는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대웅전후불탱화-보물578호)
흥국사에 참배를 가신다면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부르는 배에 꼭 승선하시기 바랍니다. 산사에 있는 이 배는 바닷가에 있는 일반적인 배와는 모양과 용도가 다릅니다. 바닷가의 배는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지만, 산사의 배는 중생들에게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반야용선은 지혜로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배입니다.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반야용선은 바로 흥국사 대웅전입니다. 누구든지 반야용선에 승선하면 지혜를 깨달아 고통 없는 부처님나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대웅전에는 반야용선을 표현한 다양한 표석들이 있습니다.
계단 양쪽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성한 이 배를 용이 수호하고 호위한다는 뜻입니다. 축대는 바다를 의미하는데, 이곳에는 게 해초 등 바다고기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대웅전 앞 석등은 향로를 밝히는 등대로서 기존의 사찰과는 달리 거북이 등위에 조성되어있습니다.
중생들의 고통을 해소하고, 지혜를 일깨워주는 흥국사는 고려시대에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바로 잡지 못한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정혜결사를 통해 승가와 사회가 나아가야할 바른 길을 제시한 보조국사스님이 창건하였습니다. 흥국사란 사명은 ‘절이 잘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한다’라며 국가와 절이 하나라는 공동운명체 틀 속에서 지어졌습니다.
왜란과 호란 등 전쟁속에서 승병을 모집하고 외적과 대항한 것도 이같은 공동운명체의 원력을 실천한 것입니다. 고통 받는 민족과 백성을 절 안에서의 수행을 통해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고통의 근원을 해결하는 자비를 실천한 도량이 바로 흥국사입니다.
관람포인트
1)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사찰입니다. 진달래꽃 속에 앉아있는 흥국사의 절경을 4월에 꼭 감상하십시오.
2) 부처님나라로 떠나는 반야용선인 대웅전을 참배하시고, 대웅전을 장엄한 조각들을 찾아 의미를 새겨보십시오.
3) 흥국사 홍교도 아름다운 멋과 맛이 있습니다. 또한 원통전도 색다른 사찰건축이니 빼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이순신 장군과 일본왜장이 머물렀다는 봉황루와 심검당에 담겨진 승병들의 호국정신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조계종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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