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치락거리며 잠이 든 지 두 시간 남짓. 경보음이 요란스레 울린다. 급하게 잠 든 몸을 깨우며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화재 알림판으로 눈을 돌린다. 화재는 아니다. 빨간 글자도 보이지 않고, 실시간 방송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경보음은 요란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저수조 수위 경보음이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지만 역시 아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나 싶어 승강기를 일일히 체크했다. 전부 정상적인 상태이다. 한 시간 가량을 울리던 벨소리가 드디어 멈추었다. 무엇 때문인지 밝히지 못했지만, 어쨋든 벨 소리는 멈추었다. 얼마 뒤 알게 사실이지만 벨 소리는 탁상 시계에서 나온 알람소리였다. 여탯껏 탁상 시계는 장식품인 줄 알았다. 휴대폰 알람을 설정하지 않고 탁상 시계로 기상 시간을 맞춰 놓을 줄은 정말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시절의 추억으로 저장 되어 있으니.
아래 글은 "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에 나오는 탁상 시계 이야기"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경우, 서투르고 서먹한 분위기와는 달리 속으로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지구상에는 36억인가 하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데, 지금 그 중의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우선 만났다는 그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하늘 밑, 똑같은 언어와 풍속 안에 살면서도 서로가 스쳐 지나가고 마는 인간의 생태이기 때문이다.
설사 나를 해롭게 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나는 그만큼의 인연이 있어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나와 마주친 것일까.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시절 인연이 다가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과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 중의 하나가 내게 온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상에는 내 생활을 거동케. 하는 국적 불명의 시계가 하나 있다.
그 놈을 보고 있으면 물건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정말 기구하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그 놈이 단순한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 새벽 예불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판전板殿을 거쳐 내려오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 다녀간 것이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버릇이라 그는 무사통과였다. 살펴보니 평소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 갔다. 내게 소용된 것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더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남들이 보고 탐낼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물건이란 본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기 마련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전생前生에 남의 것을 훔친 그 과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는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가 싶어 있는 것 없는 것을 샅샅이 뒤져 놓았다. 잃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는데 흐트러 놓고 간 옷가지를 하나하나 제자리에 챙기자니 새삼스레 인간사가 서글퍼지려고 했다.
당장에 아쉬운 것은 다른 것 보다도 탁상에 있어야 할 시계였다. 도군盜君이 다녀간 며칠 후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을 허름한 것으로 구해야겠다고 작정, 청계천에 있는 어떤 시계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데, 허허, 이거 어찌된 일인가. 며칠. 전에 잃어 버린 우리 방 시계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웬 사내와 주인이 목하目下 흥정중이었다.
나를 보자 사내는 슬쩍 외면했다.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못지않게 나도 당황했다.
결국 그 사내에게 돈 천 원을 건네 주고 내 시계를 내가 사게 되었다. 내가 무선 자선가라고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어슷비슷한 허물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인데, 뜻밖에 다시 만난 시계와의 인연이 우선 고마웠고, 내 마음을 내가 돌이켰을 뿐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1972 <무소유 수필집, 탁상 시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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