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이 되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다니는 사찰에서 법회를 보고 지난 날의 허물을 되돌아 본다.
하지만 왠지 이번 초파일은 일탈의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초파일 전날 집에와서 망설이다가 거절 할 것 같아 그러면서 아내에게 슬쩍
봉암사에 가자고 말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돌아 온 대답이 너무 싱겁다.
대번에 내일 아침 일찍 가잔다.
봉암사는 일년에 초파일만 산문을 개방한다.
그래서인지 전국에서 찿아 온 사람이 많아차를 세우고 버스로 이동을 했다.
희양산 봉암사라고 쓰여진 일주문을 통과하고 있다.
부디 세속의 때를 씻고 나오소서.
선암사의 승선교마큼이나 운취가 엿보이는 호젓한 다리 아래로 물소리가 정겹다.
조계종 종립 선원이 있는 곳으로
삶과 죽음의 일대사一大事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스님이 정진하는 곳이다.
너무도 잘 보존된 주위 환경은 청량함을 한껏 느끼기에 충분하다.
대웅보전에서 법회를 보고 있는 신도들
비빔밥을 먹기 위해 줄 선 사람들과 자원봉사로 설걷이하는 우체국 직원의 모습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봉암사 조사전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애불이시여! 마애불이시여!
들어소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근처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절벽의 거대한 바위면이나 돌에 선이나 돋을새김 기법 등으로 조각한 불상을 말한다.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겼다.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제8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