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성보박물관 소장 범어사 원효대사 진영은 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의 진영이다. 제작 연대는 1863년이며, 비단에 채색(絹本彩色)한 세로 125.2cm, 가로 93.5cm 크기이다. 향좌측 상단에는 적색 바탕에 묵서로 ‘해동초조화엄강사원효대화상진영(海東初祖華嚴講師元曉大和尙之眞影)’이라는 화제가 쓰여 있다. 작품의 보존 상태는 본지 가장자리에 부분적으로 결손이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경상북도 압량(押梁: 지금의 慶山市)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그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㝵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원효로의 명칭 부여는 위대한 고승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경산시의 원효로는 원효의 탄생지와 연관이 있다.
👨🦲전국에 산재한 원효암이나 원효사의 숫자만 보더라도 원효대사의 영향력이 1500여년을 이어져 내려왔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원효암(원효사) 전국의 사찰
1. 천성산 원효암
2. 팔공산 원효암
3. 금정산(범어사) 원효암
4.북한산 원효암
5.진악산(금산) 원효암
6.무등산 원효암
7.여항산 원효암
8. 운제산(오어사) 원효암
9.예산 원효암
10.광양 원효암 이하 등등
원효(元曉)사 극락전 뒤쪽을 돌아 북쪽으로 난 산로를 따라 200m 올라가다 보면 높이 4m의 커다란 바위가 독립되어 돌출되어 있다.
바위 전면(동북향)에 주형(舟形) 모양으로 얕게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반양각(半陽刻)의 좌불이 있다.
좌불 뒤쪽으로는 광배(光背)가 표현되어 있고 육계(肉契)가 크고 귀도 길어 균형 있는 윤곽을 이루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서 무릎을 덮고 있다.
조각 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작품으로 판단된다.
💥원효로는(검색 수 4729)
서울 용산구 원효로(검색 수 2293)
경상북도 경주시 원효로(검색 수 925)
경상북도 경산시 원효로 (검색 수 1412)
1.서울 용산구 원효로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지역으로, 청암동에서 남영역을 잇는 총 연장 2.7km의 도로인 원효로를 중심으로 행정동 원효로1동(법정동 원효로1가, 원효로2가, 문배동, 신계동)과 원효로2동(법정동 신창동, 산천동, 청암동, 원효로3가, 원효로4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동쪽은 경부선을 경계로 남영동과 한강로1가에, 서쪽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남쪽은 옛 만초천의 유로를 경계로 한강로2가, 한강로3가, 이촌동에, 북쪽은 용문동, 도원동, 마포구의 도화동, 마포동에 접한다.
2.경상북도 경산시 원효로
원효로 (경산시)
원효로(Wonhyo-ro)는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에서 시작하여, 용성면을 거쳐 연결하는 도로이다. 작명 부여의 이유는 세분의 성인(원효, 설총, 일연)을 기억한다는 이유와 특히 원효대사의 탄생지가 경산시 압량면이라는 것이다.
3.경상북도 경주시 원효로
경주시 원효로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에서 출발하여 구황동 분황사에서 끝나는 도로이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이곳에서 해동종을 완성했다고 하여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한다. 이 절은 평지 일탑 일금당의 가람배치로서 다른 사찰에서 보듯 중문, 탑,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나 절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모전탑으로 원형은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으나 그중에서 지금은 3층(국보)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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