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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40(전북)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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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복사지 오 층 석탑 /보물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만복사의 옛터에 서 있는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훗날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청도리삼층석탑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귀신사와 가까운 곳에 서 있는 탑으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 다시 복원한 것이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 무늬를,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린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지붕돌이 백제의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어, 백제 지역에 세운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 귀신사에서 조금 떨어진 밭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데, 밭이 나 씨 종중의 소유라 사찰에서 관리 보존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완주 대원사 오 층 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대원사는 삼국시대 보덕의 제자들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석탑은 2007년 혼재되어 쌓아 올린 탑 부재를 7m 정도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복원된 상태이다. 현재 가람 뒤편 높은 단 위에 세워져 있어 가람 내 전각들과 무관하게 조성되었고, 모악산의 지세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중층의 기단부, 5층의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보이나, 상륜부와 기단부는 일부 결실되었다. 기단 갑석은 경사져 있고, 상층기단의 경우 부연이 생략되었으며, 탑신석의 1층과 2층은 별도의 탑신석을 다듬어 맞추었다. 3층부터 옥개석과 탑신석을 동일석으로 마련하였고, 옥개받침을 낮은 3단으로 마련하는 등 간략화된 조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완주 대원사 오 층 석탑은 전북지역에서 유례가 많지 않은 신라계 고려 석탑으로, 조형미가 뛰어나고 비보사 탑설에 근거하여 조성한 석탑이라는 점에서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심곡사 칠 층 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신라 무염대사가 처음 지었다는 심곡사의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한 칠 층 석탑으로서, 원래는 심곡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1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지붕돌을 올리고 맨 위에는 작은 연꽃봉우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높다란 느낌을 준다. 바닥돌 위에 있는 받침돌에는 엎어 놓은 모습의 연꽃문양과 위를 향한 모습의 연꽃문양이 아래위로 각각 새겨져 있다. 탑몸돌과 지붕돌이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생략되었다. 지붕돌 받침은 3개로 표현되어 있고 경사가 완만한 지붕돌의 처마 끝은 모서리에 가서 살짝 들어 올려져 백제탑의 전통을 이어오는 면이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무성리삼층석탑 (武城里三層石塔)/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무성리 마을의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높게 마련된 축대 위에 서 있다.
바닥돌 위로 1층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탑신의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있다. 얇아 보이는 지붕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너비에 비하여 길쭉해 보이며, 기단보다 높은 탑신의 1층 몸돌 탓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고 있다. 1층으로 줄어든 기단, 3단의 지붕돌 받침, 형식적인 기둥조각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이 옛 백제지역이었던 만큼, 지붕돌의 곡선에서 백제탑의 양식이 살짝 보이고 있어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남복리 오 층 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편편한 4매의 돌로 짜 맞추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기단 맨 윗돌 위에는 높은 괴임을 두었는데, 이곳에 난간모양을 새겨놓아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 4면에는 중앙을 직사각형모양으로 얕게 파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남원 용담사 석등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용담사 석등은 전체 높이가 2.84미터인 대형의 석등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8각의 간주식 석등이다.

지대석, 하대석, 간주석, 화사석, 옥개석, 보주 등 전체적으로 온전한 형태이다. 하대석과 상대석은 8 엽의 앙련을 새겼으며 화사석은 8각 기둥모양으로서 8면 중 4면에는 장방형화창을 뚫었고 나머지 4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하대석과 옥개석에 비해 화사석이 다소 비대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장중하다.
석등의 조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용담 사지 석조불상과 칠 층 석탑이 고려시대의 작품인 점, 석등의 형태가 통일신라 시대 간주석 석등을 계승하고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의 석등으로 판단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보물

석등은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과 함께 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 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담사 칠 층 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탑은 1층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너무 길쭉하고 홀쭉한 데다가 지붕돌이 몸돌보다 두터워서 불안정한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탑신의 몸돌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6단, 4층은 5단, 5층은 4단, 6∼7층은 3단으로, 위로 오를수록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도 희미하게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측된다. 탑신의 5층 몸돌은 편편한 돌 2개를 양쪽으로 세워 위를 받치고 있는데, 이 불안정한 부분 때문에 탑이 기울어져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장문리 오 층 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1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은은한 곡선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고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이 헌칠하게 높고 이상은 급격히 낮아졌으나, 지붕돌의 크기가 거의 일정하여 밋밋한 감을 준다. 옛 백제 지역에 세워 놓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곡선미 등이 백제 석탑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지방색이 강했던 당시 시대상을 잘 담아내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귀신사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귀신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절 안에 이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 위에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추어 기단(基壇)을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거의 평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의 곡선미와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어 조성된 수법 등으로 보아 백제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순화리삼층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순창여자중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탑이 서 있던 터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당시의 옛 절터로 추측된다. 원래 탑을 세울 당시에는 기단(基壇)이 2층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래층 기단이 땅속에 묻혀 위층 기단만 땅 위로 드러나 있고, 그 위로 3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이 쌓여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에만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얇고 널따란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느린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각 지붕돌 윗면 꼭대기에는 윗돌을 괴기 위한 높은 단을 두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이 보이고 있다.
옛 백제지역에 서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서, 백제 양식 특유의 우아한 곡선미가 느껴진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금당사석탑/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금당사 경내에 있는 탑으로, 현재 남아있는 부재들로 보아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基壇部)는 가운데돌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제작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암삼층석탑/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창덕암에 서 있는 탑으로, 네모난 2단의 받침돌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의 몸돌 크기는 2층까지 거의 줄지 않고, 3층에서 눈에 띄게 줄어 전체적으로 길쭉한 인상을 주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느리게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탑에 기도한 사람은 신의 도움을 받아 소원성취 하였다 하는데, 음력 4월 8일의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기도를 드리고자 찾아온 사람들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탑동삼층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1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후 머리장식을 얹은 탑으로, 백제탑 양식을 일부 보이고 있다.

기단은 밑바닥돌이 탑의 보수 당시 콘크리트에 묻혀 버렸다. 탑신부는 각 부분을 조립하듯 여러 돌로 짜 맞추었는데, 1층 몸돌은 큰 편이나, 2·3층의 몸돌은 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1층 지붕돌은 별도의 돌로 2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장식),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옛 백제 지역에 세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 백제탑 양식의 흐름을 따르고 있어 지방적 특색을 보여준다.

회사동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절터로 보이는 밭가운데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는 곳에 굵은 2단의 괴임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 모서리에는 희미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보인다. 지붕돌은 각 층 모두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1층 지붕돌이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중후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든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으나 이것 역시 뒤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가 왜소하고 간략화되어 안정감을 잃었으나 140㎝라는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탑신부가 고르고 건실하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 위로 탑신을 받치는 굵은 괴임을 둔 점, 지붕돌 밑면받침이 3단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강정리 오 층 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기단과 탑신의 1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 엎어놓은 그릇모양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1층 몸돌이 높고, 2층 몸돌부터는 줄어드는 정도가 작다.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이 두꺼우며 지붕돌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천사 오 층 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강천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5층 석탑이다.
1층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탑신부의 각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는데, 1층은 확실히 보이고 있으나 그 위층부터는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서서히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조그만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고려 충숙왕 3년(1316) 절을 크게 확장할 때 이 탑을 세웠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기단과 지붕돌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1959년에 약간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흥리해정사 지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고부읍성이 있는 성황산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주변에서 ‘해정사’라고 새긴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 절의 옛 터로 전하고 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뒤에 따로 만들어 얹은 것이다. 각 기단의 4면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두터운 편은 아니지만 경쾌한 느낌은 떨어진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내소사삼층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내소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급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형태의 크고 작은 석재 2개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1층 탑신에 비해 2층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운산리삼층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내후사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위층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탑신의 2층 몸돌이 1층 몸돌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를 잃었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양식상의 변화를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에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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