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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39(경기)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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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어비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석탑과 석불이 있었던 사찰은 금단사(金丹寺)로 전해지고 있으나, 알려진 연혁은 없으며 산중턱에 사지의 흔적이 확인된다.

‘용인 어비리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지대석은 4매의 장대석을 결구한 전형적인 2층 기단이다. 하층 기단은 면석의 좌우에 우주를 세우고 한가운데에는 탱주를 세웠는데 낮게 모각되어 간략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층 기단은 면석의 좌우에 우주를 세우고 한가운데 탱주를 마련하였다. 탑신부는 3층을 유지하고 있는데, 1층 탑신석 하부에 별석(別石)괴임을 한 점이 주목된다. 각 층의 탑신석 좌우에는 우주를 낮게 모각하였으며,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체감을 보이고 있어 안정적이다. 각 층의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하부에 4단으로 옥개받침을 마련하였고, 처마부에는 일정한 너비로 낙수홈대를 시공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곡선을 이루고 있어 유려한 인상을 주고 있다. 용인 어비리 삼층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의 조영 기법이 통일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서울·경기지역 석탑에서 보기 드문 1층 탑신석 하부의 별석괴임을 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1층 탑신석 하부에 별석은 통일 신라 말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다가 고려 초기 이후에 성행하는데, 주로 중부 이남과 남부지방의 석탑에서 많이 채용된 결구 수법이다. 따라서 이 탑의 제작 시기는 통일 신라 말기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나말려초기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인공세리오층석탑경기도 문화유산자료

높이 약 2.5m 규모로, 하대 갑석에 해당하는 대석(臺石) 상부만 지면에 노출되어 단층 기단 석탑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내사원지(畿內寺源誌)에는 지대석과 하층 기단부가 매몰되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중 기단을 갖춘 석탑일 가능성도 있다. 하층 기단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4구씩 조각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고사리 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지대석처럼 보이는 하대석에는 16판의 복련 연꽃문양을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조각한 4장의 판석을 이용해 면석을 구성했는데 2매는 훼손되었다. 탑신부는 5층으로 1층 탑신과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1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지만, 2층 이상은 탑신부와 옥개석이 한 몸으로 제작됐다. 2층 탑신석부터 체감이 급격히 감소했지만, 3층 이상부터는 2층과 비슷한 체감을 유지하고 있다. 탑신부에는 우주를 모각했고 옥개석은 3단의 옥개 받침을 표현했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추녀선 양쪽 끝으로 합각선을 이루면서 경쾌하게 반전을 이루었다. 옥개석 윗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 받침을 모각했다. 상륜부는 사라졌지만, 5층 옥개석 상면에는 직경 37㎝의 찰주공(刹柱孔)이 남아 있다. ‘용인 공세리 오층 석탑’은 비교적 소형석탑이지만 기단의 안상과 연꽃문양 조각과 날렵한 조형미 등을 통해 고려 중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지금은 주변이 경작지로 변한 봉업사(奉業寺)의 옛터에 위치하고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로 짠 두툼한 널돌 위에 올려 완성하였는데, 이 때의 석재가 두툼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기단 위의 탑신은 1층 몸돌만 4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한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폭이 좁은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모양만 새기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지붕돌은 얇고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치켜올림도 미미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도 적당하지 못하고, 각 부의 조각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석재의 조합 방식은 우수하나, 기단에 새긴 조각이 형식화 되는 점 등에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현등사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높이 3.7m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갖추고 있다. 하층 기단은 불상의 대좌와 같이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대석의 판내에 연화문(蓮花文)과 장방형의 액(額)이 공통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중대석에는 측면 기둥인 우주(隅柱)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撑柱)가 표현되었다. 상층기단의 면석(面石)에는 양 우주와 탱주가 있는데, 기둥의 사이에는 장방형의 액을 모각하였고, 그 위에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 형태의 갑석(甲石)을 놓았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 3단의 받침이 있고 하나의 석재로 된 복발(覆鉢)·연주문(連珠文)·보륜(寶輪)·보주(寶珠) 등으로 구성되었다. 현등사삼층석탑의 특징은 대좌 또는 수미단 형태의 기단과 상층기단으로 구분하고 있는 옥개석 형태의 갑석이다.전반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작품으로, 특이한 모습의 기단부, 지붕돌의 부드러운 처마곡선 등 각 부분의 양식들이 고려 시대 후기 양식을 반영한다. 그런데 ‘성화6년(세조 15년, 1470)’에 현등사 탑을 개조한 기록이 음각된 사리구가 석탑 내부에서 발견되면서, 함허대사의 중창 시기(1411년, 태종 11)에 석탑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안성죽산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방형의 이중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갖춘 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면에 갑석만 노출되어 있고, 상층기단은 투박하게 다듬은 면석 모서리에 측면 기둥인 우주(隅柱)를 표현했다. 두꺼운 갑석 윗면에는 고려 시대 석탑에 자주 사용된 복련(覆蓮) 형식의 연잎 문양을 조각했고, 중앙에 사각형 탑신 받침을 낮게 표현했다.

탑신석과 지붕을 모방한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각기 1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탑신은 상층기단과 유사한 높이로 제작됐지만, 2층 이상부터 급격히 축소되어 고려 석탑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준다. 옥개석 낙수면은 비교적 완만한 편인데, 추녀면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角) 부에 이르면 반전을 이루고 있다.

연주암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연주암 삼층 석탑’은 대웅전 앞에 있다. 연주암은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관악사(冠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단장을 거치고, 양녕대군과 효녕대군이 머물면서 연주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높이 3.2m의 이 석탑은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각 면 6판의 단엽(單葉) 연화문(蓮花紋)을 조각하였다. 연판(蓮瓣) 위에는 각형(角形) 3단의 받침을 만들어 기단을 받쳤다. 기단은 단층으로 4매의 판석을 엇물려서 조성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가 정연하다.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기단 갑석(基壇甲石)의 아래에는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위에는 각형 2단의 받침 위에 굽형 괴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다

석탑이 위치한 지역은 봉업사(奉業寺)의 옛터로 알려진 곳으로, 발굴 조사결과 통일신라 석탑의 하층 기단을 재사용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석탑 기단 하부에서 태화 6년(太和六年, 832)명 기와가 출토되어 통일 신라부터 사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죽산리 삼층석탑은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사찰과 석탑이 훼손된 후, 고려 건국과 함께 대대적으로 석탑이 정비되면서 통일신라 석탑 기단을 재사용해 건립된 석탑임을 알 수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이천중리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안흥사에 소속된 암자에서 건립한 탑으로 추정된다.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2년 8월 6일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이 석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4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갑석만 지면에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 부재는 훼손됐다. 하층기단 갑석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두었다. 상층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이용해 구성하고,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했다. 탑신부는 1층을 제외한 2·3층 부재는 탑을 옮길 때 새로이 보강한 것으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우주를 모각했다. 낙수면 경사가 완만하고 볼륨 있게 제작한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추녀선 중앙부에서 수평을 이루다 좌우 끝에서 경쾌하게 반전을 표현했다. 옥개석 하면에는 1층과 2층은 5단, 3층과 4층은 4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외곽으로 물끊기 홈을 정교하게 표현했다.
3층 옥개석 상부에는 찰주공이 남아 있는데, 노반을 비롯한 상륜시설은 남아 있지 않다. 기단이 2층이고 3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과 석재의 결구 수법이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기단과 탑신의 괴임 표현, 옥개석의 치석(治石)수법 등에서 정형성을 잃어, 통일신라 석탑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남양주묘적사팔각다층석탑/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팔각다층석탑으로 묘적사 대웅전 앞에 건립되어 있다. 기초가 되는 지대석은 2장의 판석으로 구성했으며, 팔각형으로 되어있다. 지대석 위에는 2매 석으로 구성된 하층 기단을 놓았는데, 측면 하단에는 상각(象脚) 문양을 조각했고, 상단에는 각 면에 사각형 액(額)으로 공간을 구획한 후에 2조의 안상(眼象)문양을 조각했다. 상층기단은 아래서부터 하대, 중대석, 상대의 순서로 배치되어있다. 하대에는 상각, 안상(眼象)문양, 복연 연판문양 순서로 표현했다. 중대석은 둥근 기둥 형태의 겹우주를 모각한 후, 8면에 안상 문양을 표현했다. 상대는 앙연 연판문양 위로 각 면 2조의 사각형 구획 내부에 안상을 조각했다.
팔각형 탑신에는 각 면 모서리마다 측면 기둥인 우주(隅柱)를 모각했고, 면에는 사각형 구획을 표현했다.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1매 석으로 만들었는데, 옥개받침은 3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목조건축의 주두(柱頭)까지 모각하였다. 옥개석의 추녀는 각 모서리가 위로 반전되었고 끝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도 남아있다. 각 층의 옥개석 윗면에는 탑신을 받는 2단의 괴임이 표현되었다. 상륜부는 반구형으로 그 둘레에 삼각형 모양의 기하학 무늬를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청원사칠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청원사 칠층 석탑’은 110㎝ 크기의 정방형 석재 3매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단층 기단과 7층의 탑신(塔身)을 형성한 높이 3.45m의 석탑이다. 기단은 수미단 형태로 하대석 상면과 상대석 하면에 복련(覆蓮) 형식의 연잎 문양을 조각했고, 측면에는 각 면 4구씩 안상(眼象) 문양을 표현했다. 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워 결구했는데, 모서리에 측면 기둥인 우주를 형식적으로 새겼다. 상대 하면에 부연을 생략한 채 연잎 문양을 표현한 것은 고려 때부터 등장하는데, 사리 봉안을 위주로 건립했던 석탑의 기능이 약화 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시흥문원리삼층석탑경기도 문화유산자료

현재 보광사 경내에 건립되어 있다. 석탑의 명칭은 과거의 보광사 주소지가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였던 데서 명명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과 3층 탑신을 갖추고, 시멘트로 된 1단의 기단 위에 놓여 있다. 기단 하대석에는 각 면 2구씩 장방형의 액(額)을 형성한 후 내부에 안상(眼象)을 조각했다. 기단 중대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를 모각했다. 중대 면석은 흡사 탑신석과 가깝게 치석(治石)되어, 다른 석탑의 탑신석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갑석(甲石)은 하면에 부연을 생략해 편평하지만, 상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3층 탑신과 2·3층 옥개석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각 층의 탑신석에는 양 우주를 얕게 모각했고, 초층 탑신의 1면에는 이중으로 음각된 문비(門扉) 내에 자물쇠가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아래에는 얕게 조성된 3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에 이르러 급하게 반전(反轉)되었다. 옥개석 위의 합각선(合角線)은 둔중하여 전체적으로 평박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그 위에 각형 1단의 받침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3층 옥개석의 위에는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기단의 형태와 옥개석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제작된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절 5층석탑/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우리절 오층석탑’은 최근 창건된 우리절 관음전 앞에 건립되어 있다. 석탑은 1998년 우리절 신도가 기증한 것으로 처음 세워진 사찰 및 장소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 초에 제작된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315㎝이다.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였다. 기단은 새롭게 제작된 2매의 석재로 구성한 지대석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고 갑석을 올렸다. 면석에는 우주(隅柱)를 표현하지 않았다. 갑석 상면은 경사를 주어 물매를 표현했고, 중앙에 3단의 각호각형 탑신받침을 마련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인법륜사삼층석탑/경기도 문화유산자료

현재 법륜사 관음전 앞에 세워져 있다. 2매의 판석으로 지대석이 만들어져 있으며, 단층 기단과 3층의 탑신부로 제작된, 고려 중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1매 석재를 이용해 제작했는데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선명하게 조각했다. 기단 면석에는 측면 기둥인 우주를 모각했고, 갑석(甲石, 돌 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 중앙부에는 2단의 탑신받침을 두었다.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탑신석에는 우주만 새겼다. 옥개석은 낙수면 중앙부가 완만한 경사각을 이루며, 추녀선은 수평으로 직선에 가깝게 구성됐다. 전각부에는 낮은 반전을 표현했다. 옥개받침은 4단이며 물끊기 홈과 상면에 1단의 탑신받침을 설치했다. 결실된 상륜부에는 새롭게 복원한 석재를 설치했는데, 원형과는 다른 모습이다.

양평용천리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사나사 경내 대적광전 정면에서 약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석축으로 넓은 단을 쌓은 후 그 위에 다시 방형 장개석으로 이용해 탑구를 구성한 뒤에 건립하였다. 이중 기단을 갖춘 석탑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하층 기단의 갑석 위에 상층 기단만 남아있다. 탑은 기단 일부와 상륜부가 결실된 점을 제외하고는 원형의 부재를 지닌 삼층석탑이다. 지대석을 제외한 탑의 높이는 236㎝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양평지평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현재 지평리 지제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부재 대부분이 없어지고 현재는 1층 탑신석과 1~3층의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해 지붕처럼 덮는 돌)만 원형이고, 나머지 부재는 새롭게 만들어 수리했다. 정상부에는 다른 석조물의 부재로 추정되는 팔각형 노반석(露盤石)이 올려져 있다. 1층 탑신석 모서리에 우주를 세우고, 그 안에 각 1구(軀)씩 사방불(四方佛)이 조각되었다. 여래상들은 모두 앙련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 부분에는 두광을 표현하였다. 육계(肉髻)가 있고 머리는 나발(螺髮)로 표현되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 표시가 있는 등 전체적으로 동일한 조각 기법을 보이고 있지만 수인은 모두 다르다. 사방불의 양식은 진전사지 삼층석탑이나 청주 탑동 석탑의 사방불 등과 닮았다. 특히 여래상들은 앙련대좌와 자세, 옷주름, 두광, 상호의 표현 등에서 청주 탑동 사방불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옥개석은 규모가 작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마련하였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고 있고, 전각부는 마루 끝에서 살짝 반전을 표현했다. 낙수면은 경사지게 처마 쪽으로 내려가면서 약하게 곡선을 이루었다. 상륜부는 사각형의 받침과 보개(寶蓋)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다.

‘양평 지평리 삼층 석탑’은 사방불의 조각수법과 옥개석 표현 등을 통해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석탑은 경기도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사방불 탑신석을 결구한 삼층석탑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석탑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구리 아차산3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구리 아차산 삼층 석탑’은 1952년 붕괴(崩壞)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해발 180m 지점의 넓은 암반 위에 위치하며, 주변에 사찰과 관계된 유적이 조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산천의 지세(地勢)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裨補)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반 위에 수미단 형식의 기단을 설치했는데, 하대석은 자연석에 가깝고 중대석은 여러 매의 석재를 이용해 구성했다. 상대석은 2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부 부연을 크고 사선형으로 처리했다. 상면에는 2단의 탑신석 받침을 표현했다. 3층의 탑신부는 각기 1매의 석재를 사용해 탑신석과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을 구성했다. 1층 탑신석은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했고, 아랫면이 윗면보다 넓게 치석(治石)하여 마름모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목조건축의 안쏠림 기법을 차용한 것이다. 2층과 3층 탑신석은 1층에 비해 규모가 축소됐지만 유사한 크기로 제작됐다. 옥개석 하부에는 2단의 각형 옥개석 받침을 표현했는데,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물끊기 홈이 설치되었고, 탑신석과 맞닿는 부분에는 1단의 받침을 마련했다. 낙수면은 두껍고 중앙부가 평박한데, 추녀선을 따라 양 끝 모서리에 형성된 우동마루가 높게 솟아 있고, 전각부에 낮게 반전이 표현됐다. 상륜부는 결실되어 부재가 남아있지 않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형식과 양식, 결구 수법 등이 고려 초 충청과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성행한 백제계 석탑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간략화된 기단부의 결구, 옥개석 받침 치석 수법 등은 백제계 석탑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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