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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흥사는 신라 흥덕왕 8년(833)에 무염국사가 세운 절이다. 흥덕왕 초년에 무염국사가 웅동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기념으로 왕이 무염에게 재물과 전답을 시주하여 구천동에 터를 골라 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세울 당시에는 500여 명이 머물렀던 대사찰이었으나, 세운지 276년만에 화재를 입어 대장리로 옮겨 지었다. 조선 현종 9년(1668)에 또 다시 화재를 입어 구천동으로 옮겼다가 정조 13년(1789)에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성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지만,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대단히 기울어져 팔작지붕의 느낌을 준다. 전반적인 건축의 양식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며 기록과는 달리 대웅전은 근래에 고쳐지면서 원형에서 많은 변화가 있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성흥사는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8년(833)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웅동지방(熊東地方)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구천동(九川洞)에 지었던 것을 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온 것으로 전한다. 대웅전(大雄殿)의 창건연대(創建年代)는 알 수 없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朝鮮) 후기(後期)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로 잡석(雜石)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다.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걸었으며, 공포(包)는 기둥 사이에도 1구씩 짜 올렸다. 공포의 살미 끝에 연꽃 장식이 첨가되고 닭 등 동물 장식이 나타나는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後期)의 양식적(樣式的)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문화재지식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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