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절의 대비관음상은 중국 장인(匠人)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 소상(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년(효소왕의 일로써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혁
백률사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528년(법흥왕 15) 창건되었고, 신문왕대에 중창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1378년(우왕 4) 경주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 ?~1392)이 서루(西樓)를 중수하고 요사 2동과 회랑 및 문 등을 중건했다. 윤승순은 고려의 무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377년 계림 부윤으로 있을 때 왜구를 무찔러 이 지역을 안정시켰고, 뒤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이르렀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10년(태종 10) 일선(一宣)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이후 1604년(선조 7) 부윤 이시언(李時彦)으로 도움으로 법장(法莊)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고 그 북쪽에 요사를 지었다.
그 뒤 1786년(정조 10) 부윤 김이용(金履容)의 도움으로 선감(善鑑) 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는데, 이 대웅전은 현재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2000년에 가람 전체에 대한 중건 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절이름의 유래
백률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의 잘린 머리가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에 떨어졌는데 그 곳이 경주의 북악(北岳)이었다. 나라에서 이 자리에 절을 세워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는데 이것이 곧 지금의 백률사라는 것이다. 자추사가 언제부터 백률사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이 두 이름은 한자는 달라도 뜻은 같다. ‘자(刺)’는 ‘잣(栢)’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고 ‘추(楸)’는 산에서 자라는 ‘돌밤‘으로 율(栗)의 일종이다. 따라서 자추(刺楸)는 곧 백률(栢栗)인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 굴불사터에 있는 이 불상(qhanf121호)은 바위의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四方佛) 형태이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쪽의 약사여래는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북쪽면의 오른쪽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있는 우아한 자세 등 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남쪽면은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 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갔다고 한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