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년 원효 대사가 창건할 당시 14방(坊)의 규모를 갖춘 커다란 사찰이었다고 한다. 방(坊)이란 아마도 전각을 말하는 듯 하므로, 14동의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뒤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은데, 고려시대에 와서 회월(會月) 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서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타 없어졌다가 1626년(인조 4)에 원민 대사가 중창하였다. 또 1736년(영조 12)에도 중창이 있었다. 특히 영조 임금 시대의 중창에는 왕실과 연관이 있었던 듯한데, 이것은 안정사에 전해 내려오는 금송패(禁松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시왕전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명등계(明燈稧)를 구성하였다. 또 불량계(佛粮稧)를 조직해서 사찰 경제를 활성화했고, 1908년(융희 2) 동종을 수리하고 괘불을 수리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주도로 비밀리에 조직된 만당(卍黨)의 핵심멤버 가운데 한 분인 정맹일(鄭孟逸) 스님이 안정사 주지로 있었다. 근래에는 1950년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설호(雪虎)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 밖에 조계종 종정과 전라남도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고불총림 방장이었던 서옹(西翁, 1912~2003) 스님도 안정사와 관련 있다. 스님은 1944년까지 불교 교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귀국한 뒤 백양사와 목포 정혜원에서 잠시 주석하다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수행정진을 계속한다. 이 때 스님은 안정사 산내암자인 은봉암에서 성철스님과 처음으로 만나 평생 도반이 되었다. 이에 앞서서 성철 스님은 안정사 앞 골짜기에 초가 세 채로 된 천제굴(闡提窟)이라는 토굴을 짓고 수행하였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그 유명한 삼천배를 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근대의 고승 구하 천보(九河天輔, 1872~1965) 스님의 자취가 전하는데, 지금 있는 현판 가운데 구하 스님이 지은 안정사 시(詩)가 있다.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118㎝, 입 지름 69㎝의 범종이다.
둥근 형태의 머리 위에는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으며, 어깨부위는 사각형 모양으로 단순화된 꽃무늬를 둘렀다. 몸통은 가운데 도드라진 선을 둘러 2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위쪽은 사각형의 유곽이 4곳에 배치되었고, 유곽 안에는 꽃무늬의 유두가 9개씩 있다.
유곽 사이에는 명문이 있어 종을 만들 때 도움을 준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 있다. 몸통 아랫부분은 꽃무늬 모양의 원안에 범자와 ‘卍’자를 새겨 4곳에 배치하였다. 종의 가장 아래쪽은 덩굴무늬로 띠를 둘러 나타내었다.
전라남도 담양의 추월산 용천사에서 만든 것인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찾아오는 길
승용차편
경부고속도로로 오다가 대전에서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로 바꿔 탄 다음북통영 나들목으로 나온다.
77번 국도로 광도면 안정공단으로 다시 올라 가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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