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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전남의 사찰

가지산 보림사-77

by 돛을 달고 간 배 2006.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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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 보림사 일주문>

신라의 도의선사께서 선문을 최초로 개창한 보림사를 찿았

다. .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경내는 너무도 한적하였다.

단지 옆에는 건물 불사를 하느라고 기계음만이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대웅보전의 모습....마당 가에 핀 꽃도 자유 그 자체



창성탑 옆에 서있는 목 없는 (보살상/불상)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탑신의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일제시대 때 사리구를 도둑맞아 쓰러졌던 것을 복원한 바 있는데 이때

일부분이 손상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옆에서 본 삼층석탑의 모습.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 44호)



정면에서 바라 본 대웅보전의 모습....최근에 다시 축조한 건축물이다.





사천문 밖에서 탑을 바라보며.......





보림사의 사천왕은 표정이 너무 좋아 보인다.



 



보림사의 전경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보물 158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국보입니다.

바라만 봐도 외경심이 절로 나오네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 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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