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운흥사
바람이 나무를 부르고
그리고
풍경소리가 나를 일깨운다.
잘 정돈된 길
너무도 선명한
자연의 색깔은 언제나
나를 다시 돌아 보게한다.
깨끗하게 살게 하소서.
석등이 길을 밝히듯
저 많은 등불이
가난한 마음에 여유와 만족함을 깨우쳐
와룡산 중턱에 있는 운흥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임진왜란(1592)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고 하며, 대웅전은 이 때 불타없어졌다. 그 뒤 영조 7년(1731)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흥사 대웅전(시도유형문화재82호)은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하는 공포가 복잡한 다포식으로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포가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괘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과 조선 후기에 제작한 경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4호)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불단의 조각이 특히 화려하다.
운흥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조사가 지은 절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본거지였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 있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문화재자료147호), 범종루,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영산전은 조선 영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쉬어서 생각하는 ......빠쁜 생활의 하루를
산빛이 너무도 좋은 운흥사
돌 계단을 장식한 등.........이제는 갖가지 소원을 짊어지고 무겁겠다.
운흥사는
운흥사(雲興寺)는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의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이 때 불타 없어졌다가 1651년(효종 2) 중창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화승(畵僧)인 의겸 스님이 운흥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불화 제작활동을 펼쳤으며, 이로 인해 운흥사는 당시 불화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전엔 산내암자로 낙서암(樂西庵)있었다. 낙서암은 낙서 도인이 수도하였다고 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나는 물은 세서 이 물로 술을 빚으면 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천진암은 1692년(숙종 18) 응화선사(應化禪師)가 창건하였다. 운흥사의 여러 성보 문화재는 조선시대 사찰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찿아오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북대전 나들목에서 대전-진주 간 대진고속도로로 바꿔탄 뒤, 진주까지 와서. 여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사천 나들목에서 나와 33번 국도로 고성 방면으로 10분여 가다가 1016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삼천포(사천방면) 조금 가다 보면 와룡산 운흥사 이정표가 나타난다.
2015,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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