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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7(창원 주위에)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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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장춘사 오 층 석탑
장춘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는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었으나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다. 탑신의 몸돌은 이 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으로, 평면이 모두 사다리꼴이 되도록 윗면의 폭을 좁혔다. 이는 층수가 올라감에 따른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2층은 3단, 그 이상은 모두 2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보다는 높고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373호 보천사지 삼층석탑

의령 보천사터에 세워진 고려 전기의 탑이다. 보천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 세운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절에 빈대가 많아 살기가 힘들자 승려들이 다른 절로 떠나게 되었고 곧바로 폐사되었다고 하는데, 조선 중기 이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보물 제472호로 지정된 부도가 남아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고려탑이긴 하나 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이어받고 있다.
탑의 바닥돌은 아래에 네 모서리마다 큰 괴임돌을 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양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새겼다. 그 위의 맨 윗돌은 구성이 독특한데, 두 장의 길고 판판한 돌을 좌우로 얹고 그 사이에 작은 2개의 널 돌을 끼워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닥돌에서의 괴임돌처럼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주어 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듯하다. 위층 기단은 각 면의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을 뿐, 가운데 부분은 생략하였다.


성주사 삼층석탑
창원시 불모산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성주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10년(835)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찰 내에 있는 많은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이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현재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 있고, 위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간단한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이고 처마선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는 추켜올림이 심한 편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모양의 석재가 놓여 있지만 원래의 것은 아니다.
간략해진 수법과 양식으로 소박한 느낌을 주는 석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창원 봉림사지삼층석탑
봉림사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다가 되찾은 것이다. 관리 소홀로 많이 부서진 것을, 1960년 창원교육청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탑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은 2층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여러 차례 옮겨 다니면서 많이 깨져나가 위층 기단의 일부만 남아있다. 3층을 이루고 있는 탑신부(塔身部)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옛 모습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1층 몸돌은 두 조각으로 깨져 있던 것을 붙여 놓았는데 네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긴 것 외에는 꾸밈이 없다. 특이한 것은 2층 몸돌에 문짝모양의 조각을 둔 것으로, 보통 1층 몸돌에 새겨놓던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게 내려온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양식이나 조각수법이 자유로와 고려시대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창원 의림사 삼층석탑 (昌原 義林寺 三層石塔)

통일신라 사찰인 의림사 경내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처음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앞에 있었으나 1974년 대웅전 앞으로 옮겨 세워 일부 보수한 것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을 보이고 있다. 위·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보주(寶珠:작은 공모양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는데, 보주는 후대에 끼워 넣은 것이다.
지붕돌이 약간 파손되어 있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2개씩 조성되던 전성기에 비해 1개로 줄어들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유산포털)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함성중학교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원래 여항면 주서리 주리사 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면사무소로 이전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기단(基壇)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것이 일반 석탑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어서, 바닥돌 위에 얹힌 지붕모양의 돌 위로 네 마리의 사자를 올리고 그 위로 5층으로 보이는 탑신(塔身)을 쌓았는데, 탑신의 몸돌 하나가 없는 상태이다. 3층 혹은 5층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의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구례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회양 금장암지사사자삼층석탑, 제천 빈신사지사사자석탑 등 비슷한 양식의 탑과 비교해 볼 때, 네 마리의 사자가 포함된 기단부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사자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등을 맞댄 채 앞을 보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조각은 단순하나 각 부의 형태가 잘 드러나 있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표현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 추켜올림이 있다.

기단부에 사자상을 배치한 경우는 드문 경우로, 원형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남아있는 탑재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령 성황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탑골(塔谷)’이라 불리는 마을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절터의 이름이나 역사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세운 절이 있었으나 언젠가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한다.
탑은 2층 기단(基壇)을 쌓아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나, 탑신의 3층 몸돌은 없어졌다. 아래층 기단은 한돌로 간단하게 만들고, 위층 기단은 여러 장의 편평한 돌을 짜 맞춘 후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기단에 비해 폭이 크게 줄은 탑신부는 각층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으나 안정감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올라갔다.
아담하면서도 안정감이 있으며, 아래층 기단이 한돌로 간략화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김해 영구암 삼층석탑/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규모가 다소 작고 지대석과 기단부의 면석 및 답신석 등이 결실되어 있으나 남아있는 석탑부재들이 도드락다듬으로 치석 되었으며, 운모와 장석이 자연스럽게 마모되어 있는 조성 당시의 것이고 특히 노반 및 복발이 온전하게 잘 남아 있어 고려 말에 조성된 석탑의 좋은 자료이다.

김해 망월석탑/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망천부락의 남쪽의 탑골에 암자터가 있는데 이곳에 3층석탑이 남아있어 망월석탑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는데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1982년 흥덕사를 세워 석탑을 경내에 옮겨두고 있으며 현재 2층만이 잔존하고 있다. 일명 사왕도석탑이라고도 함. 허왕후의 고향을 기리기 위해서 망월석탑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고려후기 석탑으로 추정됨.

김해 파사석탑/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수로왕의 비 허왕후, 黃玉이 東漢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음.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본탑은 허왕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옮겼음.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시집을 오면서 불교를 전래하고 형제인 허보옥 즉,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와서 대국승으로 활약하였다고 함. 탑은 네모진 사면의 오 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조금 붉은빛의 옥문무늬가 있고 질도 달라 우리나라의 類가 아님. 닭 벼슬피에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으로 실험한 결과 파사석 부분은 물기가 계속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건조하여 말라버렸다고 함.



김해객사 후원지/경상남도 기념물

김해객사 후원 지는 김해시 동상동 구 김해읍성 내의 포교당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포교당 경내에는 駕洛古都宮墟碑와 분성대 및 연자루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석물과 함허교의 교명주로 추정되는 석재 2기, 함허교의 판석으로 추정되는 석판 6기, 석불상 2기가 남아있다.
분성대와 함허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터는 가락국 후기의 왕궁터 혹은 수로왕비의 중궁터로도 전해지며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파사석탑을 보관한 호계사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연자루와 함허정이 세워진 역사성을 가진 장소로 전해진다.

김해 안곡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안곡리 폐사지에 있는 석탑으로서 원형을 잃고 있다. 탑의 기단부는 매몰되었고, 옥개석 3매와 탑신 1매만으로 세웠는데, 3층탑으로 추정되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것이다. 잔존한 탑신에는 문비가 4면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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