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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순례기-만해 한용운 선사

by 돛을 달고 간 배 2007.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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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해인사를 참배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수치라면 수치이다. 왜냐하면 해인사는 조선의 명찰일 뿐만이 아니라

조선 문화의 최고봉인 동시에 세계적으로 귀중한 고려대장경판이해인사에 봉안되어

있으므로 외국인이라도 다투어 해인사를 참배하거늘 하물며 조선인이고 특히 승려된 사람일 수 있으리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일찍이 해인사를 참배치 못하였음을 수치라 한다.

그리하여 해인사를 참배코자 하는 것은

오랫동안 나의 소망이었다.

8월 1일 오후 9시 5분서울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일로 물금역에

도착하니 다음날 오전 7시 반경이 이었다. 자동차로 통도사에 가는

도중 양산읍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곧 통도사에 도착하여 주지 金雪岩씨외

많은 옛친구들을 반갑게 만나보았다. 조금있다가 金鏡峰씨의 조촐한 다과회에

임하고 종무소로 나오니 동경에 유학중인 姜裕女씨가 왔다.

{金剛杵}의 발간을

위하여 여러 절에 에 돌아 다니는 중이라 한다. 공공의 일을 위하는

그 열심에 감격하였다. 절안의 다과회에 임하여 주인과 손님이

서로 담화를 마칠저음 마침 비가 내린다.

가뭄뒤의 감우이므로 모두 기쁜빛을 띄었다.

저녁식사를 마친후에 객실로 옮겼다. 통도사의 귀빈실이라 하는데

그 구조와 장치가 실로 귀빈실답게 되어있었다. 비는 계속 온다.

주지화상이 오더니 나를 향하여 웃으면서 선생이 오셔서 비가 옵니다



용이 출근을 하니 비가 아니 오겠습니까?. 누가 썼는지 사무실 칠판에

이상한 글이 쓰여져있었다. {人龍乘雲八鷲山}이라는 글이 써여져

있었는데 그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선생이 조금일찍 왔으면

비가 벌써 왔지요 한다. 이것은 나의 이름이 용운이므로 하는 말이다.

나도 웃었다. 일상적인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나 주인으로서

손님을 위로하는 외교적인 말임을 깨닫았다.

古刹의 빗소리를 들어며 하룻밤 꿈이 밝았다.

3일 오후 2시경 통도사를 출발하였는데 주지화상과 김경봉화상이

6,7리나

되는 신평까지 도보로 전송하여 주심은 감사를 초월하여

몸둘바를 모르겠다.

자동차로 동래 팔송정에 도달하여 吳愰月화상의 사저를 방문하고

곧 범어사에 도달하니 주지화상은 출타를 하여 吳梨山화상의 친절한

접대로 하룻밤을 묵게되었다. 다음날에는 주지화상도 돌아왔고

오황월화상도 다시 찾아와서 두루 감사하였다.

오후 1시에는 이 절의 청년동맹의 요청으로 전문 강원에서

약 1시간 간의 강의를 마치고 절안에서의 다과회를 가졌다.

주인과 손님의 인사를 나누고 조금 있다가 청년 동맹의

다과회에 임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오 8시에 범어사를 출발할 때 팔송정에 도달하여

강유녀씨와 해어지게 되었으니 강유녀씨는 진주 옥천사로

향하고 나는 해운대로 가는 까닭이다. 동래온천을 지나

해운대에 도달하니 바로 정오경이었다. 우선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주위를 구경하였다. 해운대는 뒤에는 산 앞에는

바다의 풍광이 아름다운 천혜의 땅으로 천연의 온천이

있고 한 면에는 해수욕장이 있어서 전지요양과

피서피한의 휴양지로는 자못 이상적이다.

그러나 일찍이 조선인의 손에서는 발전되지 못하고

渡邊이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후 다소의 시설이

있었으나 충분치 못하였고 약 3년전에 다시 荒井組라는

단체의 손에 들어가서 점차 개발하는 중이나 아직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못하다. 온천은 공중욕탕과 특설

풀이 있는데 공중욕탕은 그 설비가 더무 불완전하다.

풀의 설비는 비교적 좋았으며 해수욕장은 약 10여호

내외의 캠프촌이 있을 뿐이고 해수욕의 설비는 아무것도 없다.

해운대는 아직 처녀지로 발전할 여지가 많이 있다.

마침 비가 오는 도중에 기후가 돌변하였고 禪을 해야 하므로

해수욕을 하지 못한 것이 금년 여름과 같은 혹서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크게 유감이다.

간단히 관광을 마치고 여관에 들어와 누웠더니

오후 다섯시경에 형사 두 사람이 오더니

조사는 물론 행장까지 수색한다. 행장이라는 것은

단 시일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옷 몇가지가 들어있는

조그마한 가방하나 뿐이므로 수색하기가 쉬웠다.

신분조사쯤이야 여행중에 흔히 당하는 일이지만

행장수색까지는 조금 불쾌하였다.

형사들이 돌아간 뒤에 여관주인에게 들으니

마침 조선총독이 동경갔다 오는 길에 여기에 도착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행장수색의 원인을 깨닫았다. 혹서와 번잡한 업무에

시달리는 浮世餘生으로 잠시라도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

한번쯤 凉味와 반나절의 間情을 얻어서 분에 넘치는 복을

맛보려던 찰나에 예의 형사조사와 수색을 당하고 보니

다시금 宿業(지난세상에 지은 선악의 업)을 느끼게 된다.

<滿成風雨近重陽忽催組人來敗余>의 귀절을 연상하였다.

밤에는 빗소리와 나그네 생각이 뒤섞여서 먼 꿈이 달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비가 처음으로 개였다. 아홉시 반경에 자동차로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긴소매의 도포에 의관정제한 3.5인이

유유자적하게 활보함을 보았다. 완연히 落花聲裡의 꿈을 깨닫지

못한 무능도원의 행인같이 보였다. 부산에서는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하여 다시 해인사행의 자동차를 탔다.

가는 도중에 3인의 부녀자가 늦게 온 비를 받아서 모를 심는데

그 손놀리는 것이 매우 바쁘고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근심하는

빛과 늦게라도 심게되는 기쁨의 빛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들을 향하여 축복을 하고 다시 이앙의 결과도 축복하였다.

해인사의 洞口인 유명한 紅流洞에서 해인사 주지인 許菱山씨를

만난 것은 의외의 일이다. 더욱이 서울으로부터 산으로 되돌아

오는 허능산씨를 만나게 된 것은 의외의 의외이다. 허능산씨는

내가 서울에서 떠났던 수삼일 전에 서울을 떠나서 해인사에

되돌아 왔으므로 적어도 오육일전에 해인사에 도착했어야 마땅할

허능산씨가 아직 되돌아오는 도중에서 만나게 된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물이 막혀서 머문 까닭이라 한다.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산비를 맞으면서 해인사로 들어가는

데 홍유동의 입구의 오른편 석벽에 유명한 최고운의 홍유동시

<狂奔疊石吼重巒人語難分咫尺間常恐是非勝到耳故敎流水盡聲山>

이란 귀절이 새겨져있다. 왼편의 시내 건너에는 최고운의 聾山亭이

있고 고운 최선생 逐世地라고 세긴 돌 비가 천년을 하루같이 서있다.

홍유동은 실로 속세를 떠나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홍유동에서 해인사에 이르기 까지 山回水榮 水榮山回 물구비마다

수려하지 않는 곳이 없고 산모퉁이마다 산이 아름답지 아니 한 곳이 없다.

산이 다하였는가 하면 다시 산이요, 물이 안 보였는가 하면 다시 물이다.

물구비가 충만할수록 싫지 아니하고 산모퉁이가 거듭할수록 가고 싶다.

가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감탄한다. 옥류정에 이르니

절에서 몇 사람이 나와서 주지화상을 영접한다.

조금 들어가니 그 안에 사찰의 자락이 전개되었다.

뒤로는 가야산의 주봉을 등지고 좌우에는 주봉에 이어지는

산맥의 자락이 첩첩이 포위하고 앞에는 예의 山回水榮이다.

해인사의 자락은 가야산 전체의 중심지로 그 자세가 당당하고

환경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풍채가 수려한 위인이 칼을 잡고

설교하는 것 같다. 완연히 움직이는 한폭의 그림이다.

해인사는 산수가 아름다운곳이라고 하느니 보다 성스러운 땅이다.

나는 국내외의 사찰을 다소 보았으나 해인사에 필적할 만한

절 터를 보지 못하였다. 거룩하다는 말이외에 무슨 형용사를 붙일 수가 없다.

절 안의 여러분이 반갑게 맞아 주실뿐만 아니라 壁松寺에 가 계신

전 해인사 주지 金萬應화상이 오셨으므로 의외로 반갑게 만났다.

간단한 다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다음 담소를 늦게 까지

나누고 꿈나라로 들어갔다. 7일 아침을 먹고 주지화상과 전

주지화상 김만응화상외에 몇사람의 친절한 인도로 절안

순례를 시작하였는데 먼저 大寂光殿을 참배하였다.

그 구조의 굉장하고 훌륭함은 감탄을 자아냈다.

깊이 감추어져 있는 여러 가지 보물을 보았는데,

그 보물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것이 많이 있으므로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이 적지 아니하고

다만 감탄한 것은 조선고대의 日影儀와 檀園肉筆의 화조병이었다.

화폭에는 낙관이 없음으로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유명한 화가들이 단원의 그림으로 감정하였다 한다.

대적광전의 참배를 마치고 곧 장경판을 봉안한 판전으로 향하였다

. 판전은 상하의 2개동으로 구성되었는데 동마다

30칸의 거대한 건물이다. 구조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나

웅장한 대규모와 판목을 오랫동안 안치하는데 방부에 적합하게

된 환기장치와 안전하고 간편함을 도모하는 모든 시설이

세심하고 주도면밀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지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8만여개의 장경판은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만든 세계적인 위업이다. 선조들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있는 경판을 만지는 순간 진실로 피가

끓은 사람이라면 어찌 감격의 눈물을 뿌리지 아니 하리오!.



조선의 건국이래 반만년의 역사를 이루어오는

동안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위업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있다면 이곳 해인사에 봉안한 고려대장경판, 불국사 석굴암의 불상과 석탑,

세종대왕의 한글등 몇가지 뿐이다.

이러한 위대한 유적에 참배하게 되는 것이 어찌 행복이 아니리오.

이 장경판의 유래는 대체 아래와 같다. 조성은 고려 23대왕

고종 23년(丙申)에 기공하여 동38년(辛亥,1251년)에 완성한

십육년의 세월을 소비한 조선에 이어서 실로 공전의 대공사이다.

처음에 고려 현종이 장경판을 판각하여 개성

부인사에 봉안하였다가 고종19년에 몽고병의 침략으로 불에 타버렸다.

고종은 자기의 대에 와서 선왕의 위업이

불타버린 것을 개탄하여 君民이 일심으로 재조를

맹세하고 판각을 할때는 대장도감 본사를 강화에 두고 분사를

진주에 두어서 거국적인 정성을 기울려 전후 16년 성상을

소비하여 완성하였다.그 내용은 전후의 國本과 宋本, 丹本등의

여러 장경을 수집, 엄밀히 교정하여 정확하게 판각한 것이므로

남방이나 일본의 장경판에 비하여 가장 완전정확하다. 따라서

장경판중에 고려판을 수위로 함은 세계적으로 이의가 없는 것이다.

체재로 말하면 白樺(자작나무 혹은 거제나무)의 질인데

대략 길이가 2자 5치 5분, 넓이가 8치 두께가 1치 4분이며

자체는 방형의 5.6분이요, 1면이 13행 1행 14자에 양단에

마구리목을 가하고 금속제의 장식으로 판과 마구리목을

연결하였으며 판의 정면에 옷칠을 하여 부패를 방지하였다.

판각하기 전에 원목을 바닷물에 담구어 썩지않도록 하였으므로

7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조금도 부패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이 경판을 해인사에 보관한 시기는 아직도 분명치 못하나 조선역대

실록에 <太祖 7年(1398) 戊寅5月에 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輸自江華禪源寺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라 한 것이 있다. 또 본 장경판의 화엄교분기 제 10권10장판의 윤곽 바같쪽에

<丁丑年出陸時 此?失 與知識道元同願開板入上 乙酉十月日首座?玄>

이라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장경판을 만든후에 강화도

선원사에 안치하였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온 것이다.

이조실록에 戊寅이라 하였고 沖玄의 기록중에 <丁丑年出陸>

이라하여 1년의 차이가 있으나 正史인 실록의 기록을 따름이

마땅하고 충현의 각판기재에 <乙酉十月日首座沖玄>이라 하였으니

을유까지에는 이 경판이 해인사에 옮겨온 것이 확실하다.

이 경판의 해인사에 옮겨온 연대는 이태조 7년 戊寅 5월부터

그후 을유까지의 8년간인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 경판의 수량은 얼마나 되는가?. 板數 8만1천2백58(한판 양면)인데

1천5백12부 6천7백91권의 실로 방대한 경판이다. 이를 國刊藏經板이라하니

이외에도 寺刊藏經板인 59부 3백55권의 4천7백55판이 있어서 이를 합하면

1천5백71일부 7천1백46권의 8만6천3판인 세계적으로

귀중한 보물이 이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다.

판전을 참배하고 나서 절 안의 여러곳을 대략 구경하고 잠깐

쉰 후에 監務등의 인도로 影子殿을 참배하였다. 영자전은

林幻鏡師가 거주하는 암자이다. 조금있다가 간단한 다과를

내왔는데 그 차맛이 감미롭고 이상하였다. 그 차를 石茶라고 한다.

그것은 幻鏡화상의 신발명품으로서 돌배즙이라고 한다.

돌배를 石梨라는 의미로 석자를 취하여 石茶라 명명하였다 한다.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를 통하지 못하게 하면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데 지금 마시는 차는 3년된 차라 한다.

금년에 돌배가 많이 열려서 석다를 많이 제조하였다고

차농사를 낙관하며 기쁜 빛을 보인다. 나는 차 농사의 풍작을 축복하였다.

影子殿의 참배를 마치고 주지실로 들어오니 절의 직원으로부터

나에게 설법을 청하는지라 나는 고사하였으나 벌써 여러사람에게

통고하였다하여 부득이 승낙하였다. 오후 1시반경에 대적광전에서

좌담식으로 설법을 하였는데 산중의 여러남녀가 운집하여 열심히

경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는 바이다. 곧 자리를 옮겨 산중의

다과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다과회는 근년에는 예가 없는 일이라 한다.

사실이라면 실로 과분한 일이고 부끄러움을 금할길 없다.

오후 4시경에 산중 각 암자 관광을 출발하였는데

監務張寶海講師卞雪?, 柳葉諸師가 선도하여 주신 것은 감사천만이다

. 知足庵을 거처서 白蓮庵으로 향하는 도중에 홍유동의 명물 탁주

한 항아리와 약간의 다과를 휴대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산중에서 우리의 산행의 피로를 위안하기 위하여 별도의

사람으로 하여금 酒果를 준비하여 지름길로 보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달게 먹었다.

각 암자의 관광을 마치고 황혼에 하늘을

가린 樹林의 녹색길을 통하여 주지실로 되돌아 왔다.

첫날의 정다운 이야기, 다음날의 아름다운 꿈,

마지막날의 종성을 들어며 평소에 그립던 가야산속의 하룻밤은

또다시 지났다. 떠남에 임하여 산중의 여러분이 전송하여 주신

것은 마음속 깊이 감사한다. 가야산의 맑고 푸르름도 한바탕의 꿈이다.

자동차로 기차로 속세의 먼지로 얼룩진 서울로 향하는 사람이 되었다

출처-유권준의 인터넷으로 만나는 불교문화

www:myhome,naver.com/neamant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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