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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44(강원)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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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향성 사지 삼층석탑/보물

속초에서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설악동 어귀에 세워져 있는데, 현재 탑의 위치가 옛날 그대로라고 해도 탑 주위는 절터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이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여러 장의 돌을 붙여 바닥돌을 깔고, 같은 방법으로 아래층 기단의 밑돌을 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가운데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겨두었으며, 면의 가운데에는 2개씩의 기둥조각을 새겨놓았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기고,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 2개를 조각하였다.
탑신부에서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 한 돌로 새겼는데, 몸돌마다 모서리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의 두께가 약간 두꺼운 것이 특이하며, 밑면의 받침수는 5단이다. 지붕돌 위의 경사가 급한 반면, 추켜올려진 정도는 아주 적어서 탑 전체가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옥개석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어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경쾌하게 보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1966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이때 3층 몸돌의 가운데에서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 두는 공간을 찾아냈으나 사리장치나 유물은 이미 없었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많이 나타나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탑양식과 달리, 전체적인 형태가 무겁고 형식적인 장식을 둔 면이 많다. 그러나 이 석탑은 동해안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신라시대 석탑이어서 그 보존의 가치가 매우 크다. 절터에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기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보물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으로, 현재의 자리인 홍천 군청 안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서 있던 원래의 위치는 일대가 절터였을 것이나, 지금은 밭으로 변하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 사자탑(四獅子塔)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1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 원래는 이곳에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새겼고, 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 네 귀퉁이는 살짝 젖혀져 뾰족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 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을 물씬 풍기고 있다. 각 재료의 구성이 통일신라의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지만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일산동 오층 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원래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2년 5월에 강원감영터로 이전하였다가 2000년 봉산동 시립박물관 야외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전체가 큼직한 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탑신의 각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위로 오를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비율이 단아하며, 형태도 정돈되어 있다. 지붕돌은 얇은 편이고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인데, 안타깝게도 파손된 부분이 많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서상리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영화사터에 남아 있는 3층 석탑이다. 주변에 절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탑만이 홀로 남아 옛 터를 지키고 있다.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올려진 모습이다. 현재 기단은 아랫부분이 땅속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려우나, 2층 기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윗부분만 드러나 있는 아래층 기단 위에 위층 기단이 놓여 있는데 네 모서리에 새긴 기둥표현과 맨 윗돌의 비스듬한 경사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탑신은 1층에서 높다가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이 너무 급하게 줄어들어 다소 균형을 잃은 듯도 하지만 각 부의 구성이 간결하여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중금리삼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탑을 품었던 절터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탑 이외의 다른 유물은 남아있지 않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두 탑이 거의 같은 규모와 양식을 갖추고 있다. 기단에는 기둥모양과 불법을 수호하는 8부 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만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기단에 장식된 조각수법이나 각 부분의 짜임새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상동리삼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성덕사의 옛터에 석불좌상과 함께 남아있는 3층 석탑이다.
기단(基壇部)은 아랫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3층 몸돌은 잃어버려 없어진 것을 탑을 복원하면서 새로이 끼워 넣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층과 2층은 4단씩, 3층은 3단으로 새겼으며, 낙수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붕돌의 너비가 좁고 두꺼워지는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읍하리삼층석탑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일제강점기 당시 횡성군내의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바닥돌과 기단(基壇)을 잃어버려 3층의 탑신(塔身)만 남아있다.

남아 있는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린 것이다. 몸돌의 높이는 1층보다 2층이 많이 줄어들었고, 3층은 2층보다 조금 작다. 위로 올라갈수록 적당하게 작아져 안정감을 주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고, 윗면의 경사가 급하며,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 있다. 3층 지붕돌 윗면에는 6㎝정도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 머리장식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가 없어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탑신은 아담하고 안정감이 있다. 지붕돌의 양식이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원사는 치악산 중턱인 해발 1,100m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무착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꿩이 이 절의 종을 울려서 스님을 살려 은혜를 갚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저네의 대웅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이 두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크기와 형식에 있어 서로 비슷하다. 아래 ·위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은 1층 몸돌이 큰 편이나, 2층부터는 높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모두 1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둥근 연꽃봉오리모양의 독특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붕돌 받침이 간략화된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동쪽 탑 앞에는 석불의 것으로 보이는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놓여 있다. 광배는 불꽃무늬 테두리 안에 연꽃과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대좌의 형태는 8 각형이며, 한 면의 일부가 조금 깨졌다. 불상은 남아있지 않아 그 모습을 알 수 없으나, 광배와 대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고려전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탑동삼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탑동마을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은 2층을 두었는데, 다른 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높아 안정감이 적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얕게 새긴 안상(眼象)이 있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유행양식을 잘 보여준다. 위층 기단은 맨 윗면에 두툼한 연꽃조각을 둘러놓았다. 3층을 이루고 있는 탑신부(塔身部)는 몸돌크기가 2층부터 갑자기 줄어들어 균형을 잃고 있으며, 각 층의 몸돌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두껍고 폭이 좁아 급한 경사가 흐르며, 밑면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큼지막한 머리장식이 얹혀 있어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길어 보이는 기단부,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위라리 칠 층 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고려시대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7층 석탑이다. 기단부재, 탑몸돌, 지붕돌 등이 사방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다시 세운 것으로, 지붕돌과 탑신의 1 ·2 ·3층의 몸돌은 원래의 것이고 4층 이상의 몸돌은 1975년 복원할 때 보충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커다란 바닥돌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겨놓았고, 2층에서 1층에 비해 큰 폭으로 높이가 줄어들다가 그 이후부터는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둥근돌 하나만 남아 있다.

규모만 작을 뿐, 탑신의 몸돌에 기둥을 조각한 것이나 지붕돌받침이 3단인 점 등이 "개성 남계원지 칠 층 석탑"(국보)과 매우 비슷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어 두 탑의 제작연대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방내리삼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신라의 옛 절터로 전하는 곳에 남아 있는 3층 석탑이다. 탑 주변으로 민가가 들어서 있어 탑 이외에 사찰이 있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기단부(基壇部)는 훼손이 심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고, 현재 작은 암반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쌓여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여래좌상을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두터운 낙수면에는 급한 경사가 흐른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장식)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 전체의 비례가 조화롭지 못하지만, 1층 몸돌에 불상조각을 둔 점은 주목할 만하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운 사지 삼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용문사터에 석불과 나란히 서있는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탑 주변에서 ‘용운사’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알게 되었다.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 맨 윗돌 위에는 연꽃을 두른 두툼한 괴임돌을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독특한 장식 수법이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느리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기단부 맨 윗돌이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기단 윗부분에 아름다운 연꽃을 장식한 굄돌을 두고, 지붕돌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낸다.

횡성신대리삼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봉복사 절입구의 산기슭 밭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이웃 주민들에 의하면 원래 이 터가 봉복사의 자리였다고 전해 들었다 하는데, 이로 보아 이 밭 일대가 고려시대의 옛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에만 기둥모양을 조각해 놓았는데, 탑신부의 각층 몸돌 역시 그러하다. 지붕돌은 모두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에서의 추켜올림도 거의 없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큼직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기단 부분과 지붕돌의 모습들로 보아 이 탑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원주보문사청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보문사터로 알려진 곳에 지금의 절을 새로 지을 때 중 땅속에서 발견된 탑으로, 점판암(벼루를 만들던 돌)으로 이루어진 청석탑이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구조인데, 기단과 탑신의 모습이 비슷하여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현재는 이 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의 아래에 화강암의 높고 널찍한 2층의 단을 마련해 놓았다. 아래·위층 기단은 윗면에 연꽃을 새겨놓았고,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불교문자인 범어(梵語)를 새겼다. 현재 탑을 이루고 있는 전체가 모두 원래의 것은 아니고, 탑신의 2·3·4층의 몸돌과 5개의 지붕돌, 두 기단의 맨 윗돌 외에는 최근에 새로 만들어 끼워놓은 것이다.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탓인지 심하게 닳고 부서진 부분이 많으나, 고려시대의 청석탑 양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탑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강릉관음리 오층석탑/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2층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석탑으로, 주변에 절터로 보이는 건물터와 석불의 대좌로 보이는 석물 등이 남아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글넓적한 안상(眼象)을 얕게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는데, 1층 몸돌은 큰 편이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고, 네 귀퉁이는 높이 치켜 올라갔는데, 각층이 비슷한 크기로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 위로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의 받침수가 3단으로 줄고, 네 귀퉁이의 추켜올림이 큰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청평사삼층석탑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청평사 입구의 환희령이라는 언덕 위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일반적으로 탑은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 앞에 세우는데 이 탑은 사찰 길목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홀로 서 있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들려 있어 날렵한 감을 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아담하면서도 안정감이 드는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청평사가 고려 광종 24년(973)에 창건된 사실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나라 순제(順帝)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린 뒤 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일명 ‘공주탑’이란 애칭으로도 불린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월송리삼층석탑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조 면 사(造麵寺)터로 전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주변에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절터였음을 알려주나 지금은 석탑만이 민가 골목길에 서 있다.
탑의 기단(基壇)은 맨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땅 속에 묻혀있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만 한돌로 되어 있고,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 3층 지붕돌과 꼭대기의 네모난 머리장식 받침돌이 합쳐져 각각 한돌을 이룬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새겼다. 둔하고 무거워 보이는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귀퉁이에서의 추켜올림이 거의 없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으며,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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