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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43(충남)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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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사지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도림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주변에서 ‘도림사(道林寺) ’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 터가 도림사의 옛 터임을 알게 되었다.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계속되었던 사찰로 추측되고 있는데, 화재로 모두 불에 타고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조각했는데 제법 뚜렷한 형상이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이 적당히 줄어들고 있어 깔끔한 균형을 이룬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3단씩 두었으며,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경사면은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으며,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1973년경 탑을 보수할 때 네모난 사리장치를 발견하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흥주사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흥주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일부분이 없어지거나 매몰되는 등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2층을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일부가 땅에 묻혀 온전한 형태를 알 수 없다. 각 기단의 맨 윗돌은 아래위 모서리를 깎아내어 무딘 감을 주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부분에는 기둥모양을 본떠 조각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2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비례로 보아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층 몸돌에는 각 면에 네모난 윤곽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무늬를 두었을 것으로 보이나 뚜렷하지는 않다. 심하게 닳아 있는 지붕돌은 1, 2층 모두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다. 3층에는 후대에 올려진 듯한 독특한 모습의 몸돌과 지붕돌이 보충되어 있다.
탑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시기와 비슷한 고려시대로 보인다. 일부 파손된 부분을 복원해 놓았으나 조화를 이루지 못해 어색한 모습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신원사오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인 중악단(中嶽壇) 남쪽에 서 있는 5층 석탑이다.
현재는 4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는데 이것은 목조건축의 기둥을 모방한 것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거의 수평이다. 석탑의 서쪽에는 배례석(拜石:탑 앞에 두어 예를 갖출 때 쓰는 돌)이 마련되어 있다.
중후한 느낌을 주는 석탑으로,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75년 12월 탑의 해체·복원 공사 당시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구와 함께 개원통보, 함원통보, 황송통보, 주둥이와 손잡이가 깨어진 자기주전자,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병 등이 발견되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정산남천리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탑골동’또는 ‘절골동’이라 불리우는 남천리 산골짜기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그만 절터가 하나 있다. 절터에서 조금 떨어진 산 기슭에 이르면 아담한 모습의 이 탑이 보이는데,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고, 위층기단은 모서리에만 조각을 해 두었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을 덮고있는 지붕돌은 곡선을 이루는 낙수면과 수평을 유지하는 처마의 조화가 아름답다. 네 귀퉁이에서의 들어올림도 가벼우며, 밑면의 받침은 1층에서부터 5단·4단·3단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 위로 세 조각으로 깨어진 머리장식이 위태롭게 놓여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균형미가 잘 나타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논산탑정리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탑정 저수지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석등의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魚鱗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절 주변으로 성을 쌓아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원래 탑은 이 자리에서 50m 떨어진 남쪽에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이곳에 후백제 시대의 대명스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전하지만 문헌에 남겨진 기록은 없다.
탑은 바닥돌 위에 8각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塔身)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 아래의 받침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으로,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고, 지붕돌은 밑면 안쪽에 얕은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현재 1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원래 몇 층이었는지 알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만든 시기는 고려시대일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광덕사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석탑이다.
위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고, 특히 탑신의 1층 몸돌에는 문모양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 엎어놓은 그릇 모양)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아래층 기단의 기둥 장식이 생략되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삼룡동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삼거리 공원안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지금은 밭으로 변해 버린 안서동의 유려왕사(留麗王寺)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형태는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옅게 새겨 놓았고, 탑신의 세 지붕돌은 밑면에 2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나, 탑신의 2층 몸돌 이상이 원래의 것이 아닌 후대에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갑사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원래는 갑사에 딸린 암자인 사자암에 있던 것을 대적전 뒷면에 옮겨 세웠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탑은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겨 놓은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의 일부분이 놓여 있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이 쌓여 있다. 기단은 맨 윗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고,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본래의 머리장식이 없어진 채, 돌의 질이 다른 연꽃봉오리 모양의 새로운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금암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금새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집터를 다지던 중 탑의 부분석재가 발견되어 복원해 놓은 것이다. 마을 이름은 ‘금사(金寺)’라는 절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공사 당시 금동으로 만든 불상의 일부분이 함께 발견되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뒷받침해준다.
탑은 동그란 판돌 위로 탑의 몸돌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로 5개의 지붕돌을 차례로 쌓아 올린 모습이다. 둥근 판돌이 이 탑의 기단(基壇)역할을 하는 듯 하나, 원래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나만 남아있는 탑신의 몸돌은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각층에 3단의 받침이 있다. 특히 5층 옥개석의 받침은 3단이긴 하지만 가장 하단은 굉장히 퇴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없어진 부분들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으며, 다른 탑에 비해 규모도 작고 불완전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밑받침을 3단으로 두거나, 3층 이상은 전혀 두지 않는 등 불규칙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화성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화암사라는 작은 암자의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옛 절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암자를 지을 때 함께 복원해 놓은 이 탑은 많은 부분들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은 맨 아래에 기단(基壇)의 일부로 보이는 넓적한 사각돌을 두고 그 위로 탑신(塔身)의 1층 몸돌을 올린 후, 4개의 지붕돌을 포개어 놓은 모습인데, 주변에 지붕돌이 하나 더 남아있어, 원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남아 있는 탑신의 1층 몸돌은 ⅓정도가 깎여 있어 탑 전체가 무너질 듯한 위험을 안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양 끝에서 서서히 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붕돌의 모습이나 탑의 전체적인 구성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대조사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대조사 원통보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에 다른 일부를 찾아 다시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탑신의 2·3층 몸돌과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 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받침을 두었는데, 1·2층은 3단, 3층은 2단으로 새겨 불규칙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가운데에서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위로 들려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동남리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석목리 논절부락의 고려시대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고 있는데,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있고, 탑신의 4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탑신의 1층 몸돌을 괴어주는 부분 주위로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2층 몸돌부터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는 희미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돌을 짜놓은 수법이 소박하고 다듬은 솜씨가 서투르나, 고려시대 후기 당시의 석탑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양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박물관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원래는 5층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있다.
바닥돌이 없어진 채, 1층의 기단(基壇)이 땅위에 놓여 있고, 그 위로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이 놓여 있다.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낙수면과 처마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방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처마 아래로는 받침을 새겨 두었는데, 1층은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비록 불완전하긴 하나 각 부분을 다듬은 솜씨가 세련된 작품이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예산읍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보덕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원래는 근처의 가야사터에 있었으나, 1914년 일본인이 몰래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 주지의 항의로 돌려 받아 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2층의 기단(基壇) 위로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처음에는 5층이었던 것이 훼손되어 3층 까지만 남게 되었다 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청양삼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청양삼존불입상(보물)과 함께 ‘일명사’라는 옛 절터에 있던 탑으로, 군청 뒤편에 옮겼다가 1961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 세웠다.
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간결하게 짜여 있고, 탑신은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돌로 만들어 쌓아 올렸다. 탑신의 1층 몸돌 앞면에는 문짝모양을 본 떠 새겼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개태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개태사는 고려 태조 13년(930) 고려 건국을 기념하고자 창건한 사찰로, 이후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훗날 김광영 스님이 새로 건물들을 지어 ‘도광사’라 하였다가 다시 ‘개태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탑은 옛 터에 남아 있었는데, 절을 새로 지을 때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옮길 당시 아래 부분이 일부 없어져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즉, 높직한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이 없어진 채, 5층의 탑신(塔身)만이 차례로 쌓여 있다.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에는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조각 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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