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 황석영 장편소설


황석영
고교 재학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 상했다. 베트남전 참전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단편소설 탑塔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 작했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 "가객"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 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낮익은 세상" "여울 물 소리" 등이 있다. 또한 지난 100년간 발표된 한국 소설문학 작품 들 가운데 빼어난 단편 101편을 직접 가려 뽑고 해설을 붙인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전10권)을 펴냈다.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오래된 정원. 객주 "손님"무기의 그늘 "한씨연대기"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차례
해질 무렵
작가의 말
🌐🌐서술의 짜임
1.차순아, 그녀의 일기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 동네에서 여학생은 나 하나였다.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나 말고도 유일한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언제 우리 동네로 이사 왔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국수 건조장의 다락방에 책 한 권 들고 올라가 틀어박히곤 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내가 현실을 벗어나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공간이었다. 외할머니는 서울 와서 몇 년 뒤에 돌아가셨지만 살림이 늘거나 줄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꼭 우리 세 식구 밥 먹고 살 만큼만 벌었다.
🦜🦜부산에서 살던 우리집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가 처음 내 손을 잡았던 날이 생각난다. 어느 날 우리는 동네를 멀찍이 벗어나보기로 했다. 그날 광화문까지 나가서 (러브 스토리)를 보았다. 올리버와 제니가 눈싸움하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제니가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 나는 펑펑 울었다. 그때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것 같다.
🦜🦜오직 교복을 입었던 그 동네의 둘은 동류의식으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사십여 년이 언제 이렇게 흘러갔는지 참 빠르기도 하네요. 함께 살아오고 뒤에 태어 난 사람들이 물결처럼 저 거리에 오고가는데...... 아, 있었네요. 나는 내 아이의 이름을 민우라고 지었습니 다. 김민우. 나는 그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애틋함을 여전히 가슴을 지닌 체 잊지 않고 있었겠지요. 그렇습니다. 민우라는 이름은 당신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겠지요
2.박민우 회상
이게 뭐요? 쪽지를 받아쥐고 내가 묻자 그녀는 벌써 뒷걸음으로 주춤주 춤 내게서 멀어지면서 말했다 예전부터 잘 아시는 분이라고. 꼭 전화해달라고 하셨어요.
내가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그 젊은 여성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고향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다달이 나오는 아버지의 공무원 월급이 있었으며, 해 마다 식량이 나오는 외가의 땅때기가 있었다. 다섯 마지기의 논은 어머니가 시집오면서 외할아버지에게서 떼어 받은 땅이 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읍내의 변두리 산자락이 시작되는 언덕바 지에 있었는데, 방이 세 칸에다 가운데 대청마루가 딸린 일자 집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지 전투의 무공훈장 수여자였고, 소학교를 나와 일어와 한자를 아는 덕택으로 읍사무소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고향친구 윤병구
병구의 집은 우리집과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그야말로 오두막집이었는데, 처음에는 흙벽에 초가였던 것을 나중에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병구가 나의 소싯적 친구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우리 가족은 영산읍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뜨거운 고구마 껍질로 인해 산에 불을 내고 둘이서 숨어 다니던 시기에 그는 별명이 탄 고구마였다.
💥💥윤병구와 나의 관계
내가 건축을 공부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나 윤이 건설회사의 대표가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 았으나 그후 죽이 잘 맞았던 것은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이 영산읍을 떠난 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났던 날 어느 일식집에서 자세히 들었다.
🦜🦜포클레인 기사에서 농지개량을 하고, 지방간선도로 공사로 인맥을 넓히면서 확장했다.
💥💥나는 지금
딸은 미국에 산다. 의대를 나와 종합병원 의사가 되었고 미국인 교수와 결혼했다. 유학을 갔다가 현지에서 결혼하여 자연스레 그곳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딸이 미국에 정 착하자 아내는 자주 오락가락하더니, 이제는 아예 눌러않을 생각인지 몇 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친정 식구들도 거의 미 국에 살고 있는데다 나와의 결혼생활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삐격대기 시작하여 근년에는 아예 어굿나버린 듯 바로잡기가 힘들어졌다.
🦜🦜 이미 기러기 아빠가 된지 오래이고 얼마만큼이나 고독한지 나는 모른다.
💥💥그의 사회생활
대동건설의 임회장이 찍혔다는데요 나는 그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집작할 수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고 되물었다 찍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현 정부하구 사이가 안 좋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대동건설은 한강디지털센터의 프로젝트를 우리에게 맡기고 있었다. 현재 그 초고층 건물은 반 이상 올라간 상태였다. 나는 일부러 무심하게 대꾸했다 우리야 맡은 일만 해주면 되는 거지 하여튼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해야겠어요.
🦜🦜 건설현장과 정부의 검은 거래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박민우와 차순아
차순아예요. 전화를 하셨네요. 잊지 않고 연락 주셔서 고맙 습니다. 저는 낮시간에는 통화가 어렵고 밤에는 늦게라도 괜 찮습니다.
휴대전화에 메일이 들어왔다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노안 때 문에 읽을 수가 없어서 노트북을 켰다. 알 수 없는 이메일 주소 였는데 '박민우 선생님께'라고 머리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내게 온 메일이 분명했다.
그동안 변화가 조금 있었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전화로는 연락이 안 될 것입니다. 박선생님과 연락이 되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좀 어수선했 습니다. 잊고 있던 옛날 일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 났습니다. 아니, 잊다니요. 저는 단 한순간도 제가 살아온 시간들을 잊은 적은 없지요.
💥💥서울 친구들과 가게
1.재명이 형과 가족
글러브를 끼고 엉거주춤 섰는데
청년이 우리의 등을 두드렸다. 시이 작! 하자마자 눈앞이 번쩍했다. 나중에 좀 배우면서 알게 되었 지만 스트레이트 잽이었다. 나도 맞짱은 여러 번 붙어보았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쳐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때리면 상대는 요리조리 잘도 피했고 그러면서 잼이 들
어왔다. 몇 번 더 맞았다. 화가 나면 지는 거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어느 틈에 정통으로 맞고 휘청거 리는데 코피가 흘러내렸다. 다시 들어오는 것을 허리를 숙이 고 파고들어 위를 향해 올려쳤다. 글러브에 묵직한 느낌이 전 해왔다. 녀석이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그렇지만 째깐이는 얼른 일어나 몇 번 제자리뜀을 하고 나서 다가섰다.
🦜🦜국삼, 국사, 국오 퇴가 최종학력이다.
하지만 이사 온 서울의 동네에서 만난 그들은 나를 내치지 않았다.
2. 어묵튀김 우리 가게
어묵을 한 뭉치씩 싸주면 평소에 신세를 졌거나 앞으로 잘 지내야 할 집 들을 번갈아 돌면서 나눠주는 것이 동생과 나의 임무이기도 했다. 우리집과 시장 사람들에게 공동수도 물을 받아다주고 수고비를 받는 할아버지네 쪽방이라든가 미화원 대기소, 방범 초소 등도 챙겨야 할 곳들이었다. 가끔씩은 재명이 형네 집에도 갖다주었는데, 그날은 구두닦이 아이들에게 잔칫날이 되었다.
🦜🦜소소한 것에 감동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어묵 한 꼬치, 튀김 한 조각, 국수 한 그릇 들.
3.국수 가게 차순아
아니, 국수 사러 온 아니구요. 이거요.
내가 내민 신문지에 싼 것을 그녀는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 맛있겠네! 그녀가 니를 향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나는 묵직한 타격을 받은 것처럼 가습이 아프고 답답 해졌다. 잘 먹겠습니다. 그녀의 인사말에 대답 없이 얼른 돌아서는데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이거 갖구 가세요. 그녀는 국수 한 뭉치를 집어서 내게 내밀었다.
🦜🦜교복 입은 애들이 드물었던 그 때 둘은 가느다란 친밀감을 느낀다.
순아가 나에게 찾아와 보인 태도는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다. 솔직히 달골에서 만났던 이래로 차순아와 자고 싶다는 생각에서 줄곧 놓여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상 상하면서 수음을 하곤 했다. 내 이기심은 그녀를 술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통금시간 휠씬 못미처 여관으로 갔고, 그날 밤 나는 서툴렀지만 격렬했다.
🦜🦜내 품에 안아 보겠다는 건 욕심입니다.하지만 그녀도 그런 마음이었다면 서로 간에 사랑하는 마음이 움트고 있었겠지요
3.김민우와 정우희
💥정우희
내 이름은 정우희, 벌써 스물아홉 살이나 먹었다. 예술대학을 나온 초짜 극작가 겸 연출가다.
연극을 때려치우고 직장에 들어갔었다. 이력서를 수십 군데 보내고 면접에서 떨어지기를 거듭하다가 간신히 조그마한 출판사에 들어가서 이 년쯤 일했다. 잘나가는 출판사는 베스트 셀러를 찍어내고 건물도 올리고 직원들 보너스도 듬백 준다는 데. 이놈의 출판사 사장은 워낙 밑천이 없어서인지 인기 있다는 번역물 하나 사들이지 못했다.
🦜🦜오천원짜리티셔츠 두 장과 만원짜리 청바지 하나면 봄부터 가을까지 오케이다. 와중에는 편의점 알바도 뛰어야 한다.
자정을 넘기면 아무리 중심가라도 손님이 뜸해진다. 나는 오히려 이 일을 하면서 생활 리듬이 안정되었다
그전에는 카페. 식당, 피자집, 힘버거집, 김밥집. 백화점 . 주차장도우미 참으로 별의별 일을 다 해봤다. 그러다가 편의점 야근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잠을 조금만 줄인다면 낮시간을 다른 일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연극 쪽 일이 알바보다 도 실속 없는 짓이지만, 꿈이 주는 위안을 알바일에 비교하랴.
🦜🦜건강엔 필요악이지만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도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김민우 이야기
그의 소개로 일주일 안에 대학가의 커피숍에 일자리를 얻었 다. 그는 전에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녔다고 했다. 그는 실직하고 나서 줄곧 두세 가지의 알바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가끔 그를 만났다. 주로 그가 내가 알바하는 곳으로 퇴근할 무렵에 찾아왔고, 내가 연출한 연극을 공연하던 날에는 소극장으로 그를 초대하기도 했다. 우리는 남들 눈에는 오래된 연인처럼 보일 정도로 허물없는 친구가 되어갔다. 그러나 둘 다 연애질이나 하고 노닥거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약속이라도 한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민우는 건설회사의 용역들과 함께 철거하지 않는 거주민을 처리하다 사망 사고가 발생하여 책임을 지고 잘렸지요.
💥차순아와 정우희
우희는 결흔안 해? 그녀가 불쑥 물었을 때 니는 당황하지 않았다. 주위 어른들을 만나면 그 무렵에 심심치 않게 듣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다들 포기하고 산대요 그냥 사랑하구 살면 되지. 부자건 가난뱅이건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구 살지만 내막은 모두 삭막하다구.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똑같애. 나아지는 것두 없구 달라지는 것두 없어. 그래두 어머니는 전혀 고생하신 분 같지가 않아요. 아직도 젊고 예쁘시고 부잣집 마나님처럼 보이세요.🦜🦜 나아질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암담하고 우울한 일상의 번복입니다. 결혼은 전혀 비단에 수놓인 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제사를 올릴 순 없으니 극락왕생하라고 그냥 묵념 이나 올릴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나에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영정으로 쓸 사진도 없구, 그냥 저 창 앞에 민우 녀석이 서 있는 걸로 하지 그녀가 주전자를 기울여 소주잔에 술을 따라놓고 창 쪽의 허공을 향하여 한마디 했다 한잔해라, 너 좋아하는 순대도 있다.
🦜🦜엄마도 곧 따라 떠날거야. 자살 사이트에서 예약한 회원들과 함께 죽어 간 모습을 보며 이 사회의 현실을 수긍한다. 아니 결단코 인정치 못하겠다.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