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시간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홍희정 문학동네 작가상(제18회/2013) 2025-72

돛을 달고 간 배 2025. 5. 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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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정
성균관대 서양화과와 국민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 다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에에 단편소설 [우유의식]이 당선 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생각하다.
"시간이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제목만 보고 한참을 생각해 본다. 뭘까?
누구를 지칭한 걸까? 아님 자신의 마음에 대한 혼란한 심정을 살짝 표현한 것일까?

🦜🦜율아 율아 아둔한 율아
율이의 연애가 거듭되는 내내 나는 오로지 율이만 바라보았다. 내 마음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율이 일에만 서면 넓적한 돌명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명이 막혀왔다. 섣불리 연인이 되었다가 나 또한 헤어지게 될 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개미슈퍼는 어쩌려구.
더이상 백원만, 하듯 사랑을 구걸하긴 싫어.
사색과 갈망의 시대 는 끝났어. 돈을 벌어서 여행을 갈 거야. 율이 어머니가 들으면 충격이 클 터였다. 넉 달 동안 식사도 거르면 서 대형마트 입점 반대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심지어 아들이 그 대 형마트에 취직을 한다니, 그곳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겠다니.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심보야.
💥💥
엄마는 대형슈퍼 입점 반대모임을 주도하고, 아들은 그 슈퍼에 알바로 취업을 한다.

ㅡ커피믹스 판매담당 아르바이트생인데 나보다 네 살 어려.~ 헤벌쭉 웃고 있는 율이의 얼굴을 보니 애가 탔다. 언제나 그랬다. 율이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항상 갑자기 했다.(대체 나는 율이에게 여자이기나 한 건지) 눈꼬리가 처진,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웃음과 함께. 그런 율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허기가 졌다. 애정에 목 말랐다. 걸신이 들린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율이는 나를 한순간에 들뜨게도 하고 한없이 무기력하게도 만들었다.

ㅡ사실 날이 흐려서 별 같은 거 하나도 안 보여. 춥고 어둡다. 어디야? ㅡ전국의 영세 슈퍼를 돌아다녔어. 율이가 이야기를 그만둘까봐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얘기를 들었어. -어머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야, 처음에는 그냥 미칠 것 같아서 집을 나왔는데, 걷고 또 걷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어. ㅡ거기가 어딘데. ㅡ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아마도, 아주 긴 이 야기가 될 거 같아. 그래도 괜찮아. 남은 건 시간과 나와 이야기뿐이니까. ㅡ율아. 응 율이는 항상 대답을 잘했다. 마치 누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사 람처럼. ㅡ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그 말을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마치 율이와 마주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벅차게 오르내렸다. 따스하고 농밀한 무언가가 몸속 에서 출렁거렸다. 오랫동안 율이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율이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
나도 필사즉생의 각오로 너한테 달려간다. 내가 널 책임 지도할 테니 기다려.



🦜🦜
할머니 할머니
ㅡ할머니, 뭐 먹을 거야? 할머니는 컵에 물을 따르며 짜장면 곱배기, 하고 대답했다. 나는 물수건으로 테이블을 닦으며 말했다 ㅡ여기 보통으로 시켜도 곱빼기 양으로 주는 거 알잖아. 한창때인 학생들도 곱빼기 시키면 다 못 먹고 포기해 ㅡ그래도 난 짜장 곱빼기야 ㅡ아, 글쎄, 그냥 보통 먹으라니까. 할머니 그거 다 못 먹어.

단무지를 하나 베어 문 할머니가 오물거리며 말했다 -이레야, 예전에 내가 준 그거 기억나나 그거라니? -왜 있잖아. 네 엄마 아빠 죽고 얼마 이따 내가 줬던 거. 짜장면을 입에 잔뜩 넣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고깃고깃 접한 종이를 건넸다. A4용지에는 중학생 글자처럼 동글동글한 할머니의 서체로 적힌 글자들이 빼곡했다.
김구는 73 살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51살에 위암으로 죽었고,~~~~ 방정환은 31살에 고혈압 합병증으로 죽었고,



_병원에 가서 다 확인했어.
수술이고 뭐고 다 소용없고 의사가 그 냥 먹고 싶은 거 먹고 맘 편하게 지내라더라.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누가 암이라고? 할머니는 대꾸가 없었다.
-누가 암이라고!
할머니가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대학 독서클럽 같은 데서 만나 기라도 한 걸까. 나는 거실에 않아 신문을 보는 척하며 연신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할머니의 곱게 묶은 머리와 화사한 꽃무늬 블라우스 가 꽤나 신경을 쓴 듯한 모습이었다. 완전 꽃단장이군. 나는 괜히 삐딱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난 뒤 내가 주책이라고 하자 할머니는 사못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



🦜🦜
나의 생각과 들어주는 사람
나는 다시 책을 펼치고 프란츠 카프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율이는 나에게 카프카의 책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지독히 재미가 없거든 이왕 읽을 거라면 좀 재미있는게낫지 않겠느냐는 나의 말에
율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재미있는것 그런것들이 문제야. 세상을 망치는 원흉이라고 매사에 필요 이상 진지한 것은 율이 특유의 성격 중 하나였다.

물 반 고기 반처럼 일자리는 널려 있다고 마인드컨트롤을 하던 나는 거절당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망상과 자기 비하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어영부영, 적절한 분노와 수강을 반복하는 감정상태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만은 없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면 개미슈퍼에서 율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일생일대의 사랑 같은 건 젊은 시절에 모조 리 다 겪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혈기왕성한 섹스를 젊은 시절 실컷 해버리고 몸속이 텅 빈,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는 노인이 되겠다 말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가 내 생각을 알았다면 철모르는 소리 라고 틀림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돈까지 지불하고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남사장은 어쩌면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느라 밥을 먹고 오라고 한 것인지도 몰랐다. 생선살을 바르던 나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안 가득 밀어넣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고민을 해봐도 일을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가 없었다. 기본급으로 제시한 돈도 나쁘지 않았다. 사이즈가 어정쩡 하거나 디자인이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고 일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
얼마나 속에 들은 말이 사연을 줄기 줄기 낳아서 "들어 주는 사람"까지 필요할까? 아니 가슴속에 품은 이야기도 누가 들어주었으면.


'적당한'이라는 글씨가 크고 짙게 강조되어 있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네, 여러 가지로 힘드시겠네요, 하며 '적당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여자는 속상해죽겠어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하면서 아들이 어린 시절에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지를 강조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친구를 잘못 사귀더니 엄마가 철물점 하는 것도 창피해하고 그러다 몰래 금고도 털어갔다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적당한 주의와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체험했다.
💥💥💥
들어 주는 사람이라서 힘만 새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귀가 밝아야 되는 거였어.

그녀가 아무 말 없이 하얀 손으로 율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반팔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팔이 잘 가꿔진 식물의 줄기처럼 깨끗하고 생명력 넘쳤다.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힘이 들어간 손바닥의 힘이 눈으로도 느껴졌다.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자질구레한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녀의 다정하면서도 은밀한 태도에 나는 애정의 맨얼굴을 본 것 같아 명치가 조여왔다. 나굿나긋한 그녀의 손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율이의 여자친구를 보며 바짝바짝 애가 탔다.

🦜🦜
생각 해본다.
나는 시간이 많아.
널 사랑할 시간이.
넌 왜 그렇게 바쁜  척 하는거야.
제발
시간 내어 줘.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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